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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혈육에 함께 속하심으로

본문 / 2:14-18

 

1. 인간의 한계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선 내 문제가 크고 급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타인의 사정과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큰 문제가 자신의 작은 문제보다 크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우리가 항상 자신의 입장에서만 서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입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신앙은 우리의 입장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선포하고 주님의 입장만을 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때문에 신앙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단순히 교회 출석하고, 교회 행사에 참석해주고, 가끔 노력 봉사해주고, 헌금하는 것으로 충분히 채워지는 것이라면 누가 신앙을 어렵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은 우리의 입장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앙의 길을 우리 스스로 갈 수 있다는 것은 교만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내가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실수와 허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 때문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마음은 마냥 가벼운 상태 그대로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나 때문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나로 인해서 죽으셨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또는 애통함이 전혀 없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문제를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나 때문에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 아래 나와서 그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이 과연 가하다고 여기십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나 때문이다라는 말을 입술에만 달고 살았을 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타인의 일로 여겨버리고 무관심한 채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무관심을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의 큰 문제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한평생 매인 자들

오늘 본문에 보면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2:14-15)라고 말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 인간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있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인간에게 공포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났기에 무조건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자기의 생존이 가장 큰 삶의 목표입니다.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세력 안에 붙들려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기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손을 남기고, 아들을 선호하고, 자기의 업적과 명예를 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자기의 존재가 잊혀짐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도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후손들로 하여금 제사하게, 찾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 존재의 잊혀짐을 막아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은 이것을 위해 종교를 만들어서 절에 가든지 교회를 가든지 정성을 바쳐서 자기 존재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존재가 세상에서 확고해지는 것을 세상에서는 능력이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능력이라고 합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합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 미련한 것인데 어떻게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사형 형틀입니다. 그래서 사형 형틀인 십자가는 인간들이 보기에는 죽음의 자리요 실패의 자리인데 어떻게 능력이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죽음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고 그 길은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려는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시기 위하여 자신이 사망을 맛보셔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9절에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죽음을 맛보시기 위하여 또 사망을 이기시기 위하여 혈육으로 오셔야 하신 것입니다. 혈육에 속하여야만 죽음을 맛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심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고 벌벌 떨면서 일생 동안 그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에게서 해방시키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와 함께 혈육에 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두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라고만 한다면 곤란합니다. 물론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고 또 육신의 몸을 가진 분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시어 하늘로 가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갈 길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는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거친 후에는 부활이 있고, 영원한 하늘에서 거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 축복을 소망하기에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멀리 있는 일 아니라 항상 눈앞에 펴쳐질 일로 여겨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당장 일초 후의 일이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준비하는 자로 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신 곳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 힘이 되신 분이 오늘도 우리 안에 좌정하사 다스리고 통하시니 우리의 삶이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을 통해 주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3. 그가 시험을 받아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2:16)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천사들을 붙들어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붙들어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혈통적인 후손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입니다.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2:17)고 합니다.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

혈육에 속하심으로 배고프고 목마르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나시면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을 것 같습니까? 십자가 지실 때 고통이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배가 고프고 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모양만 흉내 내신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와 같이 되어 우리를 철저히 아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으로 자비하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짐승의 피를 흘렸지만 자기들의 피를 흘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으로 혈육에 속한 자들의 연약과 부족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하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시험을 이길 인간이 없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과 세상의 영화를 줄 테니 나에게 절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유혹을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데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세 번째 밭이 가시떨기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3:22)라고 합니다.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할 사람이 있습니까?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은 여기서 다 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넘어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벽한 대제사장의 일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더더욱 우리가 감당치 못하는 내용입니다. 능력을 달라는 것입니다. 능력만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이 문제만 해결하여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의 해결이란 결국 자기의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이든, 회사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발을 다치지 않게 하는 그런 능력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까?

다른 가정은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가정은 얼마나 복되고 형통한 가정인지 과외도 받지 아니하였는데 좋은 대학에 합격을 하고, 회사는 안정이 되고, 다니는 교회는 날로 부흥이 되는 그런 능력을 갖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 능력을 받기 위하여 이것 저것 온갖 종교적인 것을 다 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이 능력 받기만을 원하는 게 인간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영광입니다. 이것을 누가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원하고 원하는 바가 아닙니까? 우리가 날마다 받는 유혹은 나는 살아야 된다는 유혹입니다. 살아도 이름도 빛도 없이 미미하게 별 볼일 없이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으면서 자기 존재를 마음껏 부각하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 교회는 무조건 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욕망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자기들의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몸이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자는 없습니다.

때로는 그런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을 통하여 자기의 이름이 남겨진다면 죽음의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가는 죽음의 길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그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자존심을 혼자서 누리며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 되면 자살이라도 하여 자기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에서 죽음에 매여 일생동안 마귀의 종 노릇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유를 입은 자들은 나는 실패하여도 괜찮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대신 죽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죽으심 안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함께 죽게 하는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더 이상의 실패가 없습니다. 더 이상의 죽음이 없습니다.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신 주님 안에 있기에 더 이상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시험에 넘어가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께서 우리보다 더한 유혹을 다 당하시고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험이나 유혹의 단계가 시작단계에서 무너져 버리기에 더 높은 시험과 유혹을 당하여 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최후의 유혹까지 다 경험하시고 이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이기심을 바라봅니다. 그 이기심이 우리를 존재케 하는 것이지, 우리의 어떤 행위가 우리의 신분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고난받으심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은 항상 고통의 의미가 강할 것입니다. 외부적인 핍박이나 물리적인 고통이 가해지는 것을 고난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유대인들에게 붙들려서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한정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내용을 보면 사단이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핍박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대화만 주고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을 두고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말만 주고받았을 뿐인데 이것이 왜 고난이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대화가 아니라 싸움이었습니다. 온 우주와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싸우는 싸움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떡과 말씀을 두고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엄청난 갈등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항상 떡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영광을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말씀으로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안에서 커다란 충돌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주체할 수 없는 엄청난 갈등인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마귀로부터 이러한 시험을 받으면서 항상 갈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사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죽음 이후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와 같은 혈육에 속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은혜는 참으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가신 그 길, 그곳을 바라보며 우리의 소망으로 굳건히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이 소망이 죽음의 두려움에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승리가 우리들로 하여금 자유를 얻게 할 것입니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은 천국을 알았을 때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항상 갈등에 머물러 살아가는 우리가 죽음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또 성령으로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 없이는 신앙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곳이 우리의 소망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건드리며 그렇게 살라 요구하고 유혹하지만 주님의 통치를 받는 우리는 하늘에 대한 소망과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평생에 우리를 다스리고 인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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