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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확신한 것을 견고히 잡고

본문 / 3: 7-14

 

1. 광야 생활

우리가 살아가면서 믿는 우리에게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게 되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뭔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런 고통스러운 것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징계의 차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부터 보면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3:7-8)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오늘이라는 말씀 앞에 ()이 표시되어 있고, 성경 맨 밑에 보면 시편 957절 이하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95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95편을 보면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95:7-11)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신명기 4장에 보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지켜야 할 하나님의 규례를 선포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을 상고해보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기적을 보이시며, 약속을 주셔서 이루어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 속에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살아남았으며, 홍해 바다 앞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적들이 바다에 수장되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 아래 있었고, 만나를 먹으면서,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입구에서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실력만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하심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지 못한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 생활은 고난과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40년의 세월을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힘든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드러내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4장에 보면 “21.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14:21-23)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 제1세대에 속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나머지 2세대들은 광야 생활을 통해 배우고 알게 된 것은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와 살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자랑할 것이 없는 주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오면서 편안하고 멋있는 삶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시고 그들을 이끌어 내신 여정이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로 막은 것은 홍해였고, 홍해를 건너자 마실 물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광야에서의 40년의 생활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믿음 없음을 낱낱이 드러내는 세월이었습니다. 편안하면 얼마든지 감춰졌을 그들의 불신앙이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해 폭로가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마실 물의 문제, 애굽에서 먹었던 부추 등과 같은 음식 문제, 고기가 먹고 싶다는 등 한마디로 말해서 음식에 대해 불평을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겨우 그런 것 때문에라는 생각으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좀 더 심각하고 큰 문제로 원망을 했다면 모르겠는데 마실 물이나, 부추 등의 먹고 싶다는 것으로 원망을 했다는 것이 우습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단지 목이 조금 말라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상태가 아닙니다. 사막에서는 물이 곧 생명인 것처럼 광야를 걸어야 하는 그들에게는 물은 곧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당장 죽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물로 인해 원망한다는 것은 오늘날로 하면 우리가 돈이 없어서 원망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정당화 될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과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잘한 것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을 보존하시고 약속하신 땅까지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그들을 붙드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로 이 땅 가운데 살게 하심으로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일들과 문제를 통하여 우리로 알게 하시려는 것 또한 이스라엘과 똑같이 우리의 믿음 없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라 인정받을 수 있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고백은 한결 같습니다. 주의 은혜로만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죄를 범했을 때 대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죄를 범했으니까 죄에 대해 하나님이 벌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무조건 하나님의 사랑을 앞세워서 모든 죄를 다 덮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당화를 꾀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는 것은 이처럼 불의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나를 붙들어 인도하심을 생각하며 크고 위대하신 사랑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심 덕분에 존재하고 있음을 가슴 속 깊이 깨닫게 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받고 누리고 있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나올 것은 오직 형제 사랑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우리의 죄에 대해 무조건 덮어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이 나쁜 짓을 했을 때 부모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나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덮어 버리고 전혀 나무라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물론 남의 자식이라면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자식이라면 나쁜 길로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옳은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해 매를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보다 더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 죄를 범한 것을 가만히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징계를 하시면서 진리의 바른길로 가도록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했을 때 징계를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인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 사랑을 안다면 고난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고, 징계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신자의 고난과 어려움과 징계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이 주시는 복을 편한함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부모로부터 매를 맞으면서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해 죄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철이 든 자식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려면 신앙에 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3:10-11)고 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원망한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은 너희도 이같이 하면 벌 받는다는 식의 엄포를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믿는 자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도 그 땅을 허락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고, 신자는 이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받은 자를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 만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거할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히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 붙잡을 것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부터 보면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3:12-13)고 합니다. 앞에서 구약의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오늘 신약의 성도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 언약 하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한계요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언약 안에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옛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아니하고 자기의 실력과 능력을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성도가 좌절하고 낙심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처음 받는 성도들도 그들의 신앙의 갈등으로 인하여 옛 언약으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여 흔들리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완전하고 온전한지를 히브리서 전체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겠다는 에덴동산의 유혹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유혹은 이 근원적인 유혹의 부산물들입니다. 그런 유혹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도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모양으로 어떻게 천국갈 수 있는가? 나 같은 게 무슨 자격으로, 하면서 주님을 붙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오늘이란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됨을 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바로에게서는 하나님이 누구관대하는 것이 완고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함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아니함이 완고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완고함은 무엇이겠습니까?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내용으로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믿게 하시는 예수님의 실력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신의 실력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진 은혜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행하는 것들을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9-12)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한 것은 사람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사람이 붙잡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 해 아래, 아담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알게 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함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아야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 것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를 늘여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소유물만 늘여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의 가치도 계속하여 증폭시켜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정신적인 가치라고 하지만 이것도 결국 자기 소유물의 목록에 추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라는 곳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신령하고, 누가 더 믿음이 좋은가로 내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모든 소유를 몰수하여 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대신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 소유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붙잡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2-14)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붙잡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도리어 자기가 붙잡힌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하늘의 상인데 그 상이란 곧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상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상과 방패가 되시듯이 그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데 그 달려가는 것이 자기가 붙들거나 정한 목표가 아닙니다. 잡힌바 된 그 세계가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지 평생을 달려가도 다 알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붙잡힌 바 되어 우리의 큰 상급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갈 뿐인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4.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

그리고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3:14)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확실한 것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입니다. 더 추가할 것도 없고, 부족함도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붙잡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0-11)고 합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합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이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시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굳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간다고 합니다. 붙잡힌바 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할만한 대상을 사랑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사랑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사랑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사랑할 자로 택하셨기 때문에 부어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의지이며 열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그렇게 붙들려 사는 존재임입니다. 그런 우리가 바로 주안에 거하는 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붙드심이라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 좋은 일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과 환경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그래서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원망과 불평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통하여 우리의 실체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그렇게 붙들어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난 주에 함께 나눈 6절에도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3:6)고 합니다. 여기서는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을 우리의 소망의 확신과 자랑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없어질 것, 즉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란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소망, 그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조절이 불가능하기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우리가 참된 소망을 가지고 되고 이 소망으로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달리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인이기에 불쌍하고 가난하고 진멸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서 무슨 자랑거리가 나오겠습니까? 질그릇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보배가 소중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자랑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하늘의 귀한 복으로 채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인생이 고달픈 것입니다. 하늘의 복으로 채우시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냥 내버려 두시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복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 때로는 징계하시고, 어렵게 하시고, 고통이 있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면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스라엘처럼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고달픈 인생은 많은 유익을 가지고 다가올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에서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만 견고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감사와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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