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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자들

본문 / 3:15-19

 

1. 하나님의 격노

성경에서는 성도를 나그네라고 합니다. 그것은 가야 할 목적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델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인데 출애굽한 사람들이 가나안에 다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말씀에서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소망을 받았다면 그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소망을 끝까지 잡지 못하고, 늘 보이는 소망만을 좇다가 계속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길이 좋지 않다고, 먹는 것이 부실하다고, 지금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자들이 가야 할 목표를 놓치고 있으니 늘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완고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하고 맛보았으면서도 그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지 않고 자신들의 열심과 힘과 능력을 붙들었기에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고는 장대한 가나안 원주민들 앞에 자신들은 메뚜기 같을 것이라 여겨 가나안을 포기하고 돌아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완고함인 것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감사와 기쁨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망하신 완고하다는 평가가 우리의 모습이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고서 어렵고 힘 드는 일이 생기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처음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마음을 들었습니까?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병 고침 받는다 등의 여러 가지 말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고생한다는 말은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하면 아무도 예수 믿는다고 하지 않을까 봐서 그런지 처음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는 대단한 기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10가지 재앙의 위력을 보면서 바로 왕이 항복한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자기들은 이제부터 행복한 생활이 보장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광야로 나서게 되자 온갖 것이 다 불평과 불만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가 훨씬 나았다는 것이 원망의 이유였습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낫지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가는데도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올 자를 가려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사나 우리의 관심사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나의 만족과 유익만이 관심이 되어 있기에 하나님도 언제나 나를 위하여 주는 하나님이어야 좋은 하나님으로 간주하여 주겠다는 본능적인 죄의 모습이 우리 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완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3:15)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오늘이라는 말씀 앞에 ()이라고 되어 있고, 성경 맨 밑에 보면 시편 957절이라고 되어 있을 겁니다. 이 말씀 또한 시편 95편에서 인용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957절부터 보면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95:7-8)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므리바와 맛사라는 곳은 같은 장소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원망할 때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다투었다고 므리바로 또 시험하였다고 맛사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든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하나님을 노하게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노하시고 격동하시는 대상이 있음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 어떤 자에게 노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기도를 안 하고, 성경도 보지 않는 사람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교회 봉사에 게으른 사람입니까? 오늘날의 교인들이 피하지 못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고, 순종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노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앞세워서 마치 하나님을 잘 섬기고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제대로 알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15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노하시고 격동하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가졌던 완고함과 같은 완고함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 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노를 발하게 하고 격노케 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완고함

늘 본문 17절부터 보면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3:17-18)고 합니다.

마음이 완악한 이스라엘은 므리바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한 것입니다. 이러한 다툼과 시험은 광야 4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 범죄로 인하여 광야에서 다 죽는 것입니다. 광야는 지나가는 곳입니다. 나그네로 가는 곳이기에 불편함이 있고, 고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야 하기에 그러한 고생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견디며 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순종치 아니함이란 약속의 땅의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예로 들어 말하는 것은 히브리서를 받는 신자들의 형편이 마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고난과 어려움에 있는 신자를 향한 서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고난과 어려움의 환경에서 마음의 완고함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기 때문에 같은 형편에 있는 신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들을 살피고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움과 고난의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스라엘처럼 마음의 완고함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완고함은 과연 무엇입니까? 마음이 완고하다고 해서 성질이 고약하다거나 난폭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완고함의 의미는 성격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노하시게 한 것이 있다면 그들은 광야에서의 삶이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애굽의 시절을 그리워 한 것입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11:18)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지금의 자신들의 형편에 대해 불만을 가졌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기를 주신 것은 단순히 고기를 먹고 싶어하니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고기를 마음껏 먹었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경이 좋으면 하나님을 잘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gks

오늘날 우리도 믿음에 대해 환경과 형편 탓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나를 잘살게만 해 주시면 하나님만 섬길 자신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즉 지금의 자신의 믿음의 문제를 환경과 형편에 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열악한 환경을 주신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를 못한다는 논리가 돼버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어려움과 고통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복된 삶입니다. 즉 믿음의 결과로 복이 주어지고 그 복으로 편안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좀 더 열심히 잘 믿어 보고자 애를 쓰기도 합니다. 열심히 믿는 것이 복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떡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본능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삶을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고난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2-3)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나타나 있습니다.

광야 사십 년의 고통과 어려움에서 이스라엘이 배워야 했던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입니다. 하나님은 떡을 주시기 위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방식의 삶을 가르치시고 그러한 삶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계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굽은 떡으로만 사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나오게 하시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며 은혜의 땅입니다. 은혜의 땅에서의 삶은 방식은 애굽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을 광야의 세월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떡의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으며, 애굽에서 자신들이 구출된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나 광야에서나 동일하게 떡을 원하고 있고 떡을 구하는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완고함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

오늘 본문 18절부터 보면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3:18-19)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떡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나라에 영원히 있도록 하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떡의 문제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떡으로만 살아가는 세상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자신이 가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고 있다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진리의 길을 바라보고 그 길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신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며 살아갑니까? 물론 하나님은 세상의 삶에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 또한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필요한 대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의 문제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구할 것이 아니라 필요대로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부족하다 여겨질지라도 그 부족함에서 하늘의 것으로 충만함을 누리는 믿음의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 떡을 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떡을 위해 존재하는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말씀보다는 떡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떡만을 바라보고 기대하면서 이 소원을 들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마음의 완고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행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과 그리고 출애굽하면서 그 약속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그들의 현실만 보고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없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자기들의 욕망에 대한 집념만이 가득하다면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든, 교회 다니는 사람이든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완고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날마다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분은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말씀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들을 고난과 어려움에서 40년간 지내게 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 또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 가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섬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격노케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행하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겠지라는 생각이나 노림수가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것이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는 곳이 어떤 나라인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바라보기보다는 자신들이 머물렀었던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실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어떤 곳이며 또 우리를 새롭게 들어가게 하고자 하시는 나라가 어떤 곳임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애굽의 삶을 그리워하고 애굽에서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야말로 완고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에서 낮아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힘든 세상의 삶에서 강퍅한 마음에 머물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을 힘으로 여기고 그 힘을 구하는 것이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우리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새로운 삶임을 배우며 알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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