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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본문 / 4:12-13

 

1. 말씀의 능력

믿는 자들이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이해할 때 주의할 것은 앞뒤의 내용은 무시한 채 내 귀에 들리는 몇 구절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지금 어떤 내용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염두를 두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몇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 치우치게 되면 비록 말은 맞게 한다 해도 그 말씀에 담겨 있는 저자의 깊은 뜻은 놓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설교하는 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지만, 신자들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힘쓰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의 능력이라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필요와 소원을 채워주는 말씀의 능력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필요나, 내세적인 필요나, 종교적인 필요와 소원들을 이루어주는 것을 말씀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평소에 소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지는 비결을 말씀을 가지고 방법론을 제시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고 합니다. 귀가 가려웠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생각한 기독교는 이런 것이고, 예수는 이런 분이다고 하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것을 채워주면 은혜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서 8장에도 보면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8:11-12)라고 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자들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백성들의 사욕을 채워주는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늘 평강을 말하고 축복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외침은 듣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도리어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요청하는 자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때가 구약이나 신약이나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고 합니다. 이 구절은 누가 봐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는 죄를 파헤치고 드러 낸다는 뜻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결산을 받으시는 분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다 드러내어 버리면 우리가 얼마나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하고 살았든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떠하다고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라고 합니다. 인간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합니다. 가끔씩 선한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 홍수 심판의 원인이었지만 홍수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1:2-4)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고 또 우리입니다. 인간의 종자, 즉 씨가 행악의 종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그 행위가 부패하여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며 물러갔다고 합니다.

또한 예레미야 13장에도 보면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13:23)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돌아올 가능성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인간 안에서 가능성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달을 정복하고 이제는 화성에 로봇을 보내어 탐사를 하고 있을 지라도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은 찾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2. 까닭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왜 이렇게 해체시켜야 하시는 것입니까? 아담의 최초 범죄 이후에 한 일은 부끄러워서 숨고 자신을 가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죄악된 역사인 것입니다. 피조물이 자기를 지으신 분 앞에서 폼을 좀 잡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법과 도덕과 과학과 교육을 가지고 스스로를 치장을 해온 것입니다.

옷을 입는 것도, 화장을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가운을 입는 것도 결국은 자기를 포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삶은 계속된 피로의 누적일 뿐이지 그 어느 것도 참된 안식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2-3)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해체를 당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수치와 부끄러움과 죄악이 만물을 지으신 분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포장하려고 합니다. 무언가 고상한 것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그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이며 그 돌을 믿는 자는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1-8)고 합니다.

버림받은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8절에 보시면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 )고 하여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를 미리 정하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믿는 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앞에서 벌거벗겨 졌는데 그 앞에 선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마치 아담처럼 무슨 장식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믿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다 드러내고 해체되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자들은 주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자기를 치장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와 마음의 생각과 계획까지 말씀 앞에서 다 해체되어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 지면 질수록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3. 떡으로 사는 것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분명하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야 할 부분은 지금껏 앞에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하면서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말하던 저자가 갑자기 말씀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파헤친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1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4:14)고 하여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여 예수님을 믿는 도리로 말하고 그분을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말씀이 우리에게 하는 일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의 도리로 삼아야 하고 그분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한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떡의 문제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없을 때 물만 있으면 자기들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여겼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먹을 것만 있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즉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환경이 문제지 자신들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환경만 좋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도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느라고 바빠서 교회를 등한시 할 때 나도 돈이 많으면 이렇게 바쁘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러면 나도 하나님을 더 열심히 섬길 수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믿음의 문제의 원인은 환경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제공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고기를 원할 때 고기를 주시고, 만나를 내려 주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먹을 것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럼 과연 이스라엘이 그러한 환경에서 신앙으로 살았습니까? 그들은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는 환경에서도 가나안을 바라보고 그곳의 원주민들을 두려워하여 들어가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이스라엘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좋은 환경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을 세상에서 찾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고생하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떡은 없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분명 떡이 필요합니다. 떡 없이 성경만 들여다본다고 해서 배부른 것도 아니고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다니기도 하고 장사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회사도 장사도 모두 그만두라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떡이 나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떡이 있어야 살지만 그 떡이 나를 책임지지 않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떡이 나를 책임진다는 세상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살아갑니다. 그것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이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각한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육신의 문제만 생각하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땅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하소연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심각한 문제를 파헤치고 깨닫게 하기 위해 말씀이 있음을 본문이 말하는 것입니다.

즉 본문의 의미는 단순히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된다는 강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내 자신의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떡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함을 알게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4절에서 예수를 굳게 잡을지어다라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떡을 원하는 것은 떡이 있어야 내가 살 수 있고, 떡이 있어야 지금의 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문제는 떡으로만 해결된다는 방식이 곧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떡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에게 유익된 대로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환경에서 배우게 하실 것이 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가난을 벗어나는 것만을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것을 위해 떡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에게 가난은 힘든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고통이 있고 더 힘든 것이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 문제입니다. 가난한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멸망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비참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환경만 보이게 되고, 결국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이 비참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참함을 해결하는 길은 돈을 버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떡으로 사느냐 말씀으로 사느냐는 것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말씀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4. 말씀으로 사는 것

오늘 본문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알게 한다는 것보다는 인간의 비참을 말씀이 보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문제를 말씀을 통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혼에 문제가 없고 육신의 문제만 가지고 산다면 모든 것은 떡으로만 해결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떡을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떡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는 것은, 눈앞의 환경만을 바라보는 무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인간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으되 예수님을 붙들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문제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살길임을 알았기에 예수를 붙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붙들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떡을 주는 분으로만 여깁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해서 하나님 앞에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잘난 자가 아니고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수치와 악함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를 들여다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벌거벗은 수치를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말씀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말씀이 파헤치는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떡도 이런 인간의 문제와 비참한 상태를 고칠 수도없으며, 해결하지도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자연히 떡이 아니라 말씀을 선택한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광야생활을 통하여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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