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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맹세

본문 / 6:13-20

 

1. 열심과 노력

우리는 지금껏 믿음은 우리가 힘쓰고 노력하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말씀인 11절부터 보면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6:11-12)고 말씀하는 내용을 보면 그 분위기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여기 11절에 부지런함을 나타내어라는 것이나, 12절에 게으르지 아니하고나 또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의 느낌이 우리의 노력과 힘씀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우리가 힘쓰고 노력하고 열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부지런 해야 할 이유가 없고 또 본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부지런하지 않아도 부지런하신 하나님이 다 책임지실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구원은 우리가 힘쓰고 노력하고 열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닌데, 우리에게 부지런할 것과 게으르지 말 것 그리고 본받아야 할 것 등을 가르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을 때 나타나는 생각입니다. 모든 행위의 결과가 우리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함으로써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하느냐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와 혼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말할 때 그러면 우리가 하지 않아도 다 된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구심을 갖는 것입니다.

러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그 초점을 내가 아닌 하나님께 두고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인간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셨고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즉 예수님은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보면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예수님은 세상에 제자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오래 참으며 부지런히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지런은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뤄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부지런조차도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는 차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에 대하여 이미 실패를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자들이기에 자신들의 열심과 부지런함을 자신들의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십자가 전에 가졌던 생각처럼 누가 크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제자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제자들과 같이 부름받고 보냄받은 신자는 부지런, 열심, 인내,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힘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나타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시는 흔적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부지런하다면 내가 믿음이 좋아서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신 결과임을 아는 것이 신자에게는 중요합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신앙의 열심조차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떤 일에 대해 부지런과 열심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부지런하고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힘쓰기 때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고 또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2. 하나님으로만

오늘 본문 13절부터 보면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6:13-15)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이 내용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 이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22:16-18)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창세기의 이 약속의 말씀을 받기까지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오래 참고, 이삭을 바치고 나니 이러한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에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6:13-15)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과 인내에 대해 엄격한 시험, 즉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아끼지 아니하는 시험을 거친 후에 약속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그 약속의 성취는 이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마저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21:12)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다른 자녀가 아닌 오직 이삭에게서 나는 자만이 아브라함의 씨라고 칭할 것이라 합니다.

결국 이삭은 그 씨를 낳을 때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혹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살게 될 것입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아들 이삭까지도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약속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이 오래참음으로 버티고 견디고 본받아야 할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서 말한 대로의 이런 내용을 대할 때마다 그러면 내가 열심을 낼 이유가 뭔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열심 자체를 자신의 의도에 따라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심의 의미를 내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다면 내가 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할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아들까지 제물로 바치는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열심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심도 아브라함이 복을 얻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까지도 결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행할 수 있었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일을 행하게 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처럼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 믿음에 의해 움직여지게 될 것입니다. 내 선택적 의지가 아니라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의해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부터 보면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6:16-17)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를 합니다. 그래서 맹세가 최후 확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툼의 최종 확정도 맹세로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맹세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스스로 지키시겠다는 결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보다 더 높으신 분이 없으시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셨기에 이 약속은 절대로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던 것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도 없는 아브람을 불러서 어떻게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만드시는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일방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시고 일방적으로 맹세하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여야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람이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모델이기에 그리고 우리 또한 그런 아브라함처럼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어떤 행위를 가지고 복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의 행위 자체를 묵살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 행위가 있으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행하도록 합니다. 즉 믿음은 신자의 행위를 동원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으로 그리스도가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4:2)고 말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1)라는 말씀을 합니다. 문맥으로 본다면 바울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두고 본다면 바울 사도와 야고보 사도의 말은 서로 만나서 완벽한 믿음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로 의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야고보 사도의 말은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써 믿음이 증거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삭을 바치는 행위가 아브라함 스스로 만들어낸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맺어진 열매고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며 또한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됩니다. 즉 의의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는 행위까지 이끌어 내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3. 신자의 삶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맹세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떤 사람으로까지 만들어 가시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것은 부르시고 그냥 알아서 하라고 내팽개쳐 두신다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에 대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래서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6:18)고 합니다.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는,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신한 사람들인 우리가 이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하여, 큰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맹세하실 때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6:18/표준새번역)라고 합니다.

변할 수 없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아니하는 사실, 즉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변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피신한 자들이 큰 안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브라함 됨은 사람의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로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신자라면 신앙은 막연히 천국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로 날마다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신앙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맹세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명령하시면 그것으로 다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아브라함이 알아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물론 모든 사람은 스스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항상 부르신 하나님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고쳐 가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열심이 동원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포기되지 않는 열심을 드러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맹세인 것입니다. 이 맹세에 의해 하나님은 날마다 나를 고치시고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신앙은 쉬는 것도 중지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에게는 오늘은 내 마음대로 살고 내일부터 잘 믿어야겠다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믿음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를 소유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해야 하며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오래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천국을 가는 용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믿어서 천국만 가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안 믿어도, 내일 잘 믿으면 천국은 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세워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있음을 도외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부터 보면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6:19-20)고 합니다.

신자는 이 소망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내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실체란 아브라함도 믿고 기뻐하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복이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휘장 안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 휘장이 찢어지고 이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처소에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의 닻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란 우리의 의지나 감정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맹세로 이루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란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 것이기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 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우리의 큰 안위가 이러한 약속위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이루신 일이기에 주께 감사하며 찬양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천국 보내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 이삭까지 바치는 아브라함으로 고치셔서 진정으로 복된 자의 모습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항상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서 그러한 자로 고침받는 일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안다면 이러한 삶에 열심이 신자인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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