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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브라함의 십분의 일

본문 / 7: 4-10

 

1. 신앙과 상식

성경의 내용은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관심거리는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과연 그 관심거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거의 대부분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거나 또는 자기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은 하나같이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것도 또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이 사람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성경의 내용에 관심을 두고 있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 관심이 엉뚱한데 있다면 결코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관심을 두는 척하면서 모든 마음은 다른데 집중 되어 있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속에 바로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늘도 본문에도 지난주에 이어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어쩌면 우리는 멜기세덱에 대한 것을 몰라도 신앙에는 지장이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모인 우리가 생각해도 멜기세덱을 모른다고 해서 우리 신앙에 지장이 있을 것같이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멜기세덱을 몰라도 예수님은 잘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골치 아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멜기세덱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몰라도 또는 다윗이나 이스라엘의 전쟁 이야기 등 이런 모든 것들을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만 알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멜기세덱이나 다른 내용의 이야기들을 단지 신자를 교훈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교훈을 위한 것이니 설령 몰라도 되는 것이고 그러니 별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단순한 교훈집이 아니라 하나님을 계시하는 책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시고, 여러 사건을 일으키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모든 일을 동원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십니다.

러므로 신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자 한다면 자연히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몰라도 세상을 사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말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노아 때의 사람들처럼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필요치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필요치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의 세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생각처럼 멜기세덱을 몰라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는데도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내용과는 분명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신자는 신앙의 내용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릅니다. 그런 바른 신앙의 내용을 담고 사는 그가 참된 신자인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에는 십일조, 기도, 예배, 봉사 등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가 이 내용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 보면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행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의도는 전혀 모른 체 그렇게 행하는 것만으로 스스로 족한 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잘못 된 것이라면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내용을 보기보다는 겉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또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다만 자신이 그렇게 행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렇게 행하기만 하면 참된 것으로 인정해 버리기 때문에 멜기세덱을 알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할 때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믿어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믿으면 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알고 왜 믿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만든 자기 상식인지도 모른 채 참된 것으로 여기면서 자기 상식을 신앙의 근거로 삼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잘못된 내용으로 채워진 가짜 신앙에 속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우리가 항상 점검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2. 십일조

오늘 본문에 보면 십분의 일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구약의 십일조의 배경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멜기세덱을 모르면 십분의 일의 의미도 모르게 됩니다. 십분의 일의 의미도 모르면서 십일조를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바른 내용의 십일조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십일조의 중요성은 바쳐야 하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십일조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왜 십일조가 등장하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십일조에 대한 바른 내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십일조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은 바치면 복 받는다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십일조가 등장하는지 그리고 십일조의 바른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 것 몰라도 십일조만 철저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 강할 것입니다.

목사에게도 역시 십일조는 철저히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관심의 전부일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누가 하고 또는 누가 안하는가를 감시하는데 관심을 두기도 할 것입니다. 과연 이런 것이 바른 것인가를 오늘 본문의 십분의 일의 의미를 통해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7:4)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예전 개역 성경으로 보면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7:4/ 개역성경)고 합니다.

멜기세덱이 우월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바친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받았다는 것은 레위지파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십일조를 받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자기들의 형제에게서 받지만 레위지파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침으로, 십일조를 받고 있는 레위지파도 아브라함의 허리에 속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브라함이 바친 것으로만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가 바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대의 모든 사람들까지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멜기세덱의 우월성 앞에 복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부터 보면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7:5-6)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십일조를 취하라는 것이었지만, 멜기세덱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서 좋은 것 십분의 일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위에 있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부터 보면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7:7-8)고 합니다.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말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해서 복이란 높은 자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멜기세덱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높은 분으로서 낮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멜기세덱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로 오시지 않으시고 왜 레위지파를 세웠다가 레위지파도 아닌 유다지파로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레위지파로 오셨다면 더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율법에 의하여 세워진 제사장 직분입니다.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알리고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여 세워진 제사장의 연약함을 보라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죽을 자들이지만 멜기세덱은 항상 산 자로서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9절부터도 보면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7:9-10)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만이 바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후대의 레위까지 바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레위도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로부터 십일조를 받은 레위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제사장의 그 역할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받았던 레위도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 앞에서 복 받은 자로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진 복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의미입니다. 십일조를 통해 아브라함과 레위 그리고 이스라엘 모두가 하늘에서 주어진 복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단지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 자손 제사장은 십일조를 받는 자였지 십일조를 바치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바친 적이 없는 그들도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음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십일조는 단지 돈을 바치고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돈을 바치는 것을 십일조로 알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분명 잘못된 신앙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좋은 것 십분의 일을 바친 이유는 자신의 승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바친 것이 아니라 복을 받았음을 알았기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분의 일을 바친다는 것은 노략물 중 일부를 바친다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바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십분의 일의 의미입니다.

신자가 하늘로부터 받은 복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1:3)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1:3 / 표준새번역)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안에 있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이미 그 복을 다 받은 자들입니다.

과연 이 복에서 십분의 일을 골라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십분의 일, 즉 십일조란 내 소득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서 교회에 헌금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영원한 생명의 복에 감사하며 가장 좋은 것을 바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오직 예수님으로 삽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의 좋은 것을 바치는 것, 즉 십일조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이 복의 근원임을 아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으며, 예수님 때문에 생명의 복을 누리고 있음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일조 삶인 것입니다.

 

3. 십일조 하는 자세

그래서 나의 소득에서 일부를 바치는 것으로 십일조 한다고 여기지 마시고 그냥 헌금하는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것도 눈치 보면서 억지로 하지 마시고,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내가 주안에서 하늘의 복을 누리는 자라고 알고 믿는다면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도록 하십시오.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는 그 어떠한 법에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행함으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안에 있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복안에 있기에 뭐든지 기뻐서 자원해서 하는 것이 신자의 자유인 것입니다. 무엇이든 자유함 안에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십일조란 법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만이 우월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법에도 매일 이유가 없습니다. 레위 자손 제사장이 십일조를 받는 것은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위 자손도 아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는 레위까지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이 됩니다. 법보다 멜기세덱이 더 높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높으신 분이며 신자는 예수님께 매인 것이지 법에 매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관습에도 법에도 매이지 마시고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생명의 복에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때문이지 우리의 십일조 때문이 아님을 생각하시고, 예수님의 은혜에만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께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십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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