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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앙의 개혁

본문 / 9: 1-10

 

1. 인간의 생각

우리는 살아가면서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고, 종교계에서도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도 개혁이라는 말은 아주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흔히 개신교인 기독교를 개혁주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 당시 천주교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15171031일에 천주교회의 잘못된 종교적인 관행과 신앙의 모습 중에서 95개의 항목을 적어 독일 비텐베르그에 있는 성당의 문에다가 써서 붙임으로 시작됩니다. 이때 붙여진 95개 조항의 반박문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이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독일 전국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의 움직임이 태동하게 되고 결국 개신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마틴루터는 기존의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은 3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로만,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이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동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이 변질이 되었던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루터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무시되고 소외되었던 본질적인 것들을 다시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개혁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개신교회는 그것을 기념하여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날의 교회는 개혁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지금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꾼다는 의미가 어떤 제도나 의식 등에 통용됨으로 말미암아 마치 개혁을 제도나 의식을 버리거나 새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혁 한다는 말을 할 때도 그 의미는 교회에 전해지고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의식 등을 바꾸고 새롭게 하자는 의미가 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가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옛 관습이나 의식을 버리거나 새롭게 하면 참된 교회가 되고, 참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혁하자는 사람들이 주로 주장하는 것은, 현재 난무하고 있는 교회 담임목사의 권세에 대한 변화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목사가 성도들 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에 대한 강요를 하지 않는 것, 교회가 재정의 많은 부분을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 등 이 사회가 볼 때 정의롭다고 여길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주장들이 타당한 것이고 또한 교회가 그렇게 하면 불신자들이 바라보는 교회에 대한 인식도 많이 좋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스스로도 그런 모습을 통해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았다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게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가 그렇게 달라졌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참된 교회가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제도와 의식과 생각이 달라진 것뿐이고, 달라진 의식과 생각에 의해 다른 형태의 교회가 세워진 것일 뿐입니다. 이점을 생각하지 못하면 항상 참된 교회상을 보편적인 다른 교회와의 제도와 의식의 차이에서 찾으려고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신앙의 개혁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자에게는 어떤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까?

 

2. 개혁

오늘 본문 9절부터 보면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9:9-10)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개혁이라는 말의 의미를 통해 신자에게 있어야 할 개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약의 성막과 그 성막에서 행해지던 제사 예법에 대한 것입니다. 성막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비석들이 있습니다.

세 가지를 언약궤에 넣어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만나를 통해서는 떡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법에 순종치 않음을 고발하는 것이고, 싹난 지팡이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세워 일하고 계심을 보지 못하고 모세만을 봄으로서 우리도 너보다 못하지 않다는 교만을 고발하고, 언약의 비석들을 통해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금송아지의 형상을 더 신뢰하고 섬기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가 제물의 희생의 피로 깨끗케 되어짐을 제사와 제물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궤에 피가 뿌려지는 지성소는 휘장으로 성소와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제사장도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대제사장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7절부터 보면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9:7-8)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둘째 장막은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피를 뿌리는 지성소에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들어오도록 허락된 것은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거룩한 자만 들어갈 수가 있는데 그 누구도 거룩한 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길이 나타나지 아니했기에 하나님이 명하신 예법을 따라 제사를 드리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막의 예법으로는 성도를 온전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씻는 예법은 육체의 예법으로써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일 뿐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한 개혁할 때란 언제를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길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때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우리의 생명의 길이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15:37-38)고 합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어서 둘이 갈라 놓았던 성소의 휘장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드디어 길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개혁은 육체의 예법을 따르던 것이 이제는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육체의 예법을 중시하고, 육체의 예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분명 아직도 개혁되지 못한 신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앙의 개혁은 육체의 그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고 오직 길이 되시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된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와 의식을 바꾸고 버린다고 할지라도 참된 개혁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개혁된 신자는 육체의 행함을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았음을 믿을 뿐이고, 그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고 내 마음이 주님에게로 더욱 깊어진다면 하나님이 나를 어떤 삶으로 인도하시든 감사와 기쁨을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생각이 개혁된 신앙인의 생각인 것입니다.

 

3. 개혁된 신앙

그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교회는 개혁의 의미조차도 교회의 유익과 발전에 두고 있기도 합니다. 기존의 교회와 다른 제도와 다른 모습을 갖춤으로써 기존 교회에 식상한 사람들을 끌어모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을 빙자해서 교회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개혁은 나를 향한 관심과 교회를 향한 관심에서 주님에게로 돌아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개혁에 대한 예를 성경의 내용에서 한 곳만 찾아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기적의 내용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고자 했는데 중간에 큰 광풍을 만나 줄을 지경에 되었는데 에수님이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여 무사하게 건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내용을 무작정 인간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해석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믿으면 다 된다고 하는 믿음 만능론과 같은 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풍랑도 잠잠케 하시는 분이니 그런 예수님을 믿고 어떤 문제가 내게 다가온다 해도 걱정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기도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믿음이 적어서 그렇다고 하며 기도하는 본인의 믿음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결국은 신앙의 목표와 방향을 오직 자신의 문제 해결에만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된다는 말이 우리가 그냥 듣기에는 아주 신앙이 굉장히 좋은 말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앙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하셨지만,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배에 타고 계심에도 풍랑 때문에 불안해하고 무서워 떨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정말 믿음이 있다면 풍랑 때문에 무서워 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무서워했다는 것이 책망의 이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4:38)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마치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예수님을 부르면서 왜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으로만 바라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과연 그러한 분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신자가 위기에 처해도 전혀 도와주지 않는 분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신자를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식으로 도와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위기에서 건지기도 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마치 버려두신 것처럼 방치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에는 동일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나를 비켜 갈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며, 기독교 신앙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에는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심에도 풍랑은 제자들을 위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겪는 현실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결국 풍랑을 잠잠하게 하긴 하셨지만 그것은 제자들의 애원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그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무서워한 것에 대한 것도 아니고 또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하게 해 줄 것임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도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던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우리 인생을 도와서 우리가 원하는 길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면 풍랑이 있다고 해도 잠잠케 하시는 것도 예수님의 뜻이고, 풍랑에 죽게 하시는 것도 예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풍랑이 있을 때 내가 죽게 되었는데 왜 도와주지 않습니까?’라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풍랑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까? 라고 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그리고 이 믿음은 항상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의 세계가 달갑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이 이 믿음의 세계, 즉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세계에는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음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는 분으로만 바라본다면 그 역시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에게 믿음이 있을 리는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책망은 바로 이런 의미의 책망인 것입니다.

여기 보면 풍랑으로 인해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풍랑도 깨우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렸던 세계는 그 어떤 풍랑에도 흔들림 없는 세계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제 살았다. 예수님 감사합니다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이라면 대개 역시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고 하면서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풍랑이 잠잠해졌다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그러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게 됩니다. 40절부터 보면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4:40-41)고 합니다.

이것이 풍랑으로 인해서 제자들에게 일어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러한 앎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물음으로 새롭게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들의 변화이며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개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변화가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또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던 예수님은 모두 지워지고 새롭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은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에게 모든 마음을 쏟도록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 힘으로 견딜 수 없는 환난과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자들이 만난 풍랑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한 예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 주님의 이러한 은혜로 우리 모두를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라고 이것은 성령이 오심으로써 신앙인을 이렇게 개혁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바라보는 자는 개혁되지 못한 자입니다. 여전히 육체의 예법에 매어있는 자입니다. 길이 나타났음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길을 걷는다고 하지만 바른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성소의 예법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따라서 길이 되신 예수님을 보지를 않고 여전히 육체의 예법에 매어 자신의 행함을 보며 사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예법을 따른 것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준되어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거하는 성도들을 향한 복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값없이 영원한 복에 거하게 되었음을 바라보며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개혁된 신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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