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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새 언약의 중보

본문 / 9:11-15

 

1. 착각

난 시간에 말씀드린 하나님의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라는 구조로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지만.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 한차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날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처럼 지성소가 이스라엘에게 금지된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상소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신다는 것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막고 계심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 대제사장도 이런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자신의 몸에 피를 발라야만 했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것은 다만 피로써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서 과연 흥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는 재미없고 딱딱한 구약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몰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이런 구약의 내용들을 덮어 버린 채 예수님을 말함으로 인해서 예수님에 대한 많은 잘못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약은 믿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본질을 찾게 해줍니다. 가령 지성소의 규례가 말해주는 것은 인간은 무엇으로도 하나님께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의 위한 화목제물로 오셨음을 그리고 우리의 길로 오셨음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말 그대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오인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 같고 또 자신이 믿음이 없는 것 같은 착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의 결과이고 또 이러한 무지는 구약에 관심이 멀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아예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예수님을 말함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살피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나의 생각을 앞세우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살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오직 예수

오늘 본문 11절부터 보면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1-12)고 말합니다.

여기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결국 이 창조에 속하여 손으로 지은 장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세의 장막으로부터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의 성전까지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기에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도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현현하시는 장소요 제사를 드리는 곳이며 기도를 들으시기 위하여 눈으로 주목하시고 자기 이름을 두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지은 바 된 곳이기에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온전하지 못하기에 무너지고 사라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 2장에 보면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19-22)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고 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죄목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도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서야 예수님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즉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성전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과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만을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게 된 설교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7:46-51)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다는 설교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설교중 인용한 이사야서 66장을 보면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66:1-2)라고 합니다. 결국 신약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는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도 보면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8:27-30)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한 후에 하는 기도입니다. 자신이 건축한 전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향하여 주목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약에서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데반의 설교뿐만이 아니라 바울 사도도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17:22-25)고 합니다.

이 내용은 바울 사도가 아덴(아테네)에서 전도하면서 한 말입니다. 이방인들이 온갖 신전을 다 지어 놓고 있기에 참 신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땅에서 성전을 건축한다고 말하는 정신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손으로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발상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전 되심과 온전한 속죄를 모독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기 마지막 구절을 보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성소도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구약의 성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어 들어가신 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의 성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시고 다른 속죄 제물의 피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예배당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의 온전한 장막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손으로 지은 장막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의 장막에 모든 관심을 두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장막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들의 손으로 지은 예배당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나라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내 손으로 예배당 하나 지어 바치는 것을 더 큰 소망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부터 보면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3-14)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의 제사가 온전하지 못한 이유는 다만 육체만 정결케 할 뿐이지, 그 양심은 온전케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겉만 씻는 것이지 속은 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리는 것은 율법하에서 정결케 하는 규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육체를 정결케만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섬기되 겉으로만 섬기지 마음으로는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앞에 9절부터 보면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9:9-10)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과 또 율법의 예물과 제사는 개혁의 때까지 육체의 예법만 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깨끗함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오직 예수님의 피로써만 거룩함을 입은 의의 나라인 것입니다.

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나머지 온전치 못한 것들은 다 철거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의 성막과 제사장을 믿지 못하기에 늘 보이는 건물과 지상의 인물들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어느 장소가 거룩한 곳이 되겠으며, 지상의 어느 인물이 양심으로 죽은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함이란 영원하신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그리스도의 피만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인간의 의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가 나를 살렸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할 수도 없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이 큰 자랑거리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행한 것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것을 바라보며 만족해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려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러워하며, 자신을 높이려 하는 마음은 결국 입술은 예수님을 향해 있으나 그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천리만리 멀어져 가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또 전혀 보지를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가를 물을 뿐입니다. 우리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모두 쓸모없는 쓰레기들이며, 배설물일 뿐입니다.

수님의 거룩하신 피가 우리를 붙들고 있고 감싸고 있는데 무엇을 들고 하나님께 나가겠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직 예수님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3. 중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시는 것은 예수 믿고 뭘 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믿음이 있으면 뭔가 행해야 하지 않느냐?’는 인간들의 종교 공식에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짐을 진 채 행함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면서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의 기쁨과 감사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무엇을 지었고 또 무엇을 했는가를 보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믿고 감사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에 부족함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으로 우리의 생명은 이미 충만해져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9:15)고 말씀합니다.

여기 이로 말미암아 즉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양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이 일을 인하여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신 것입니다. 옛 언약 하에서 속죄 제사는 과거의 죄들을 다루는 것이지만 그러나 새 언약의 제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위한 영원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언한 새 언약의 특징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며 또한 죄를 사하되 영원히 기억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온전함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율법주의에서 찾고 있는 경우는 없습니까? 자기 열심에서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온전함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온전함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란 모든 것의 원인은 하나님이 이루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신 것의 결과만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은혜의 나라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서 또 무엇을 얻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언약의 내용이 아니라 그 언약의 성취에 있다고 했습니다. 옛 언약이 인간에게 성취를 요구한다면, 새 언약은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새 언약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이루신 것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새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만을 높이고 자랑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신자답게 살아가느냐입니다. 그리고 신자다움이란 우리의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안다면, 그 앎이 그 사람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그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그 앎이 묻어나올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살아계신 거룩한 말씀 앞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무엇이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씀을 통해 다시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리스도만 찬양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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