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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죄를 없이 하시려고

본문 / 9:23-28

 

1. 정해진 일

람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하여 대단히 궁금해합니다. 어찌 보면 그만큼 미래가 불투명하고 또 미래에 대한 확실성이 없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무당이나 또는 점집들은 동네에 대나무나 빨간 깃발 세워놓고 사람들 기다리며 하는 작은 일이었지만, 요즈음은 신문에도 광고를 내고 인터넷으로도 점을 쳐 주는 등 거의 기업화가 되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점을 치러 다니는 자들의 심리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현재의 일들이 잘 풀리지 않든지 또는 미래에 대하여 불안하기에 나쁜 일들은 피하고 좋은 일들이 생기도록 처방을 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다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흔히 예언을 하고, 예언을 받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점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교회에서 하는 것이기에 자신은 미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운명을 피하려고 하여도 절대로 피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여 놓으신 일입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점을 치고 처방을 내린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정하여 놓으신 일을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정하여져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의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정하여져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그냥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러나 오늘 말씀은 죽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은 아주 먼 미래에 일어날 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지금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며 마치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는데 오늘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처럼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과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아주 먼 미래의 일이 아닌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로 보고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왜 그런 자가 복이 있는 것인가를 아브라함을 통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18:16-21)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 세 사람을 접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나그네가 천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20절에 천사를 여호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 천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왔지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가지고 온 사신과 같은 존재이기에 그들의 말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가고 한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알려 준 것은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일을 이루실 것에 대해 말해 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주신 것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이 가득하여 심판을 집행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에 대해 하나님이 부른 아브라함은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어 알게 되지만 소돔과 고모라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모릅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디모데후서의 말세에 고통 하는 때라는 상황과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들이 종말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 성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동일하게 이 말세의 고통 하는 때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복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같은 복이 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들어 알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된 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들어 알게 된 것이 복된 것입니까?

사가 전하여 준 심판당할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심판받을 그 성에서 벗어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하나 그 성에 들어간 천사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리도 이 세상의 심판에 대해 안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심판받을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받을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마칠 것을 아는 자만이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심판에 대하여 아는 자가 복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알고 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 장차 일어날 심판에 대하여 아무런 경각심 없이 살고 있다면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지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든 아니든 간에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처럼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1-29)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게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이며,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선한 분이란 하나님만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일만 선한 것입니다.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로 보아주시는 것이지 그 외에는 선으로 인정을 하지 않기에 모두가 악한 일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준이며 이 기준에 의하여 우리는 서게 될 것입니다.

 

2. 죄를 없이 하시려고

오늘 본문 23절부터 보면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9:23-24)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모형들은 짐승의 피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참 장막에서 제사장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부터 보면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9:25-26)고 합니다.

구약에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제물의 피로서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 말은 매해 반복되는 제사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그리고 온전하게 영원토록 효력 있는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창조로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끝에 나타나신 이유는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 즉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주님으로 인해 나의 죄가 없게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즉 죄를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의를 보이고 행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게 되었다는 것은 심판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보기 위해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도 또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큰 복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소식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저 오늘을 살기가 바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와서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나를 위한 삶을 살고자 할 뿐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주님은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다시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라고 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인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죄값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쨌든 인간이 한번 죽으면 그 인간의 죄값이 치러지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심판과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다 할지라도 내가 죽는 것으로 그 죄값을 치르는 셈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러나 죄값으로 인한 죽음은 단순한 육신의 사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약의 제사가 인간의 죄값을 대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값으로 대신 죽으심을 보여주는 모형이었을 뿐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으로서 죄값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자신의 행함과 의를 가지고 죄를 없이 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뿐인 것입니다.

죄 없는 자는 심판과 상관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바로 이들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심판과 상관이 없는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세상을 끝내기 위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주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그 약속 안에서 믿는 자로서 항상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교회에 와서도 자기 자신을 주인의 자리에 놓고 예수님은 자기를 도와주는 분으로만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늘의 생명과 복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모두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 모든 소망을 두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한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기에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인내는 나의 참을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 사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을 가진 자로서, 예수님을 알게 된 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많이 갖게 합니다. 신앙은 교회를 출입하고 교회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가 없게 된 것을 아는 신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복된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존재성을 안다면 복된 존재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복을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누리고 있는 풍성한 복을 내어놓으며 살 뿐입니다. 세상이 소망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고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사나 죽으나 주님만을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날 위해 죽으신 그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따라서 신자로서 게으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소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충실해야 하는 것은 죄가 없는 자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3. 오심, 다시 오심

오늘 본문 마지막절을 보면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9:28)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신앙은 당연히 예수님의 죽으심이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기에 십자가와는 당연히 상관이 없는 믿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단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만을 바라보는 수준의 믿음일 것입니다. 십자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신뢰한다면 그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 기적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이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결코 소홀히 여겨서도 안되고 또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라 하여 가볍게 지나가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철저히 우리의 문제를 파헤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쉽게 나의 죄 때문에라는 답을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또 다시 죄가 무엇인가?’를 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떤 상태에 처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간이 어떻게 되어진 것인가? 등등 쉴 새 없는 물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너무 잘 알고 있다며 가볍게 지나가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단절이 화목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으로 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과 은혜 안에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떤 자리에 와 있는가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고 그 피의 은혜를 알게 된 신자의 자리가 어떤 것인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아무 생각없이 교회 다니는 것을 전부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신앙을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밖에 안됩니다.

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있게 된 자리는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가 없습니다. 신자의 자리라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신자의 자리는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주어진 은혜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마련된 신자인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런 은혜가 허락되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러므로 이 자리에 있는 신자는 자신의 의로움이나 행함을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으로 인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예수님만을 구주라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신자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와 상관없이 주님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렇지 아니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두 번째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 주님을 기다리며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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