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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좋은 일의 그림자

본문 / 10: 1- 4

 

하나님의 뜻

우리가 지난주에 나누었던 히브리서 9장의 마지막 절을 보면 이와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9:28)고 말씀합니다. 여기 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것은 재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런데 여기서 죄와 상관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거룩한 신부로서 거룩한 신랑을 기다리는 것이 예수님의 피로써 값 주고 사신 그리스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고 말씀하면서 또 9절부터 보면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21:9-11)고 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 모습이 온갖 보화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불로써 시험할 때 태워질 것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불로 연단된 금은보화로 만들어진 거룩한 성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친히 제물이 되사 자격 없는 우리를 거룩케 하신 어린양이신 거룩하신 예수님의 신부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로마서 8장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고 합니다.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롭게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거룩함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의롭다함과 영화로움 사이에 성화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부르신 자를 영화롭다고까지 하셨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함도 이미 단번에 얻은 완료형인 것입니다.

러나 우리의 종교적인 본능은 점진적으로 무언가 나아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초보 단계이고, 그 이후로 점점 더 고급해 지는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야 처음 믿는 사람보다 오래 믿은 사람이 더 나은 무엇이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으로 낯설게도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스스로 거룩함에 이를 수가 없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제사 제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의도는 그것으로 자기들의 죄, 자신들의 실체를 알게끔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러한 뜻으로 주신 율법과 제사 제도를 가지고 오히려 자기 자기을 치장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법이 가입한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미 로마서를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율법이 가입함으로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받은 자들은 누가 율법을 잘 지키는가를 내기하고 경쟁하면서 계급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는 더욱 거룩함에 이르게 되고 지키지 못하는 자는 거룩함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인간은 무엇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으로 자기 자랑과 자기 치장용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원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인위적으로 자신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두렵고 부끄러워서 하나님 앞에서 숨고 자신을 가린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가리는 일에 동원되는 역사입니다.

모든 행위의 밑바탕에는 자신의 근원적인 부끄러움을 가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가리고 치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들이 모두 자기의 부끄러움은 숨기고 자기 멋진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위선이 나오고 위장이 나오고 거짓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위장을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칭찬도 하고, 적당히 인정도 하면서 인간의 가능성도 높여가며 자랑거리들을 만들어주면 좋아할 텐데 그러한 위장들을 들추어버리기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이 붕대를 풀고서 거울을 보게 되면 십중팔구 거울을 깨뜨려 버린다는 것입니다.

난 시간에 스데반 집사가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지을 수 있는가 하면서 너희들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인 자가 되었다고 하자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결국 율법이 있고 제사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배척받았다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들이 복음에서 다시 율법과 제사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기에 율법과 제사가 어떻게 모형과 그림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자꾸만 율법과 제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무언가 행할 수 있다는 쪽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이 행한 것이 죄뿐이고 오직 살리시는 것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공로로만 되는 것이기에 자기 자랑이 들어설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행함의 가치와 의미를 두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본성은 이것이 싫은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내가 그래도 저런 사람들보다 낫다는 말을 하고 싶고, 자아의 확대와 존귀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존재입니다. 무엇을 해도 이것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율법의 요구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택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이 기뻐하는 것만을 택하여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인간이 성경을 세상을 향한 욕망을 가지고 대한다는 것은 그것은 이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의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성경을 대한다면, 사사로이 자신의 욕망을 내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우리에게 선포될 뿐이지, 인간과의 타협도 아니고 또한 부탁도 아닙니다.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이것이 아니면 아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대한다는 것은, 그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처럼 욕망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는 사람은 성경에 시큰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욕망으로 무장된 인간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늘 본문은 제사와 죄에 대한 내용입니다.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 백번 천번 제사를 드려도 안되는 것이 죄를 없게 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죄사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우리가 시큰둥하다면 그것은 뭔가 달리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에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10:1-2)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처럼 구약의 율법이나 제사나 제물 등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합니다. 즉 이것들은 실천이라는 자체적 요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구세주가 누구시며 또 오신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에 우리 시선을 두지 말고 참된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제사와 제물,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며, 진정한 구세주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림자에 대하여 시선을 거두지를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율법대로 하지 않으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입니까? 왜 이토록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지를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시장에 서서 하기를 즐겨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들은 왜 기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했던 것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신앙을 보여야 했고, 신앙을 보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종교적인 행위가 전부였던 것입니다.

율법은 신앙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만약에 율법이 없다면 신앙을 보여줄 눈에 보이는 기준이 없어서 난감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율법은 자신의 신앙적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자신 스스로도 하나님의 백성이 확실하다는 확실성을 확인하는데도 율법은 좋은 도구가 될 것입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행위가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등의 행위가 많이 보이는 사람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높이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분위기입니다. 러한 분위기의 교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율법이 말한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제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요구는 실천이 아닙니다.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알라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이 누구인가를 확인시키기 위해 율법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아야 율법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럼 율법을 지키지 말란 말이냐?’라는 반발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지킬 수가 없는 것이고 그리고 율법이 요구한 바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 누구도 없음을 알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법에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기능이 없습니다. 즉 제사도, 제물도 사람을 온전케 하는 기능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제사를 드려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와 제물을 통해 흠 없는 제물의 희생, 즉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희생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자신이 죄사함 받게 되었음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그것이 거룩한 신자인 것입니다.

만일 제물로 인해 온전케 될 수 있다면 반복해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매년 제물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율법으로 온전케 될 수 없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푸른 초장

오늘 본문 3절부터 보면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10:3-4) 말씀합니다.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다는 말은 제물이 완전한 속죄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때마다 자신의 죄를 의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제사를 드릴 때마다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는 자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는 해마다 계속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림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해도 제사를 마치고 나면 또 다시 죄를 짓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죄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제사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기 보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인간의 손으로 바치는 제물로는 죄를 없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죄인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없이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셨다면 이스라엘의 제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 반복 되어져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사와 제물은 효력을 잃어버렸고,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을 믿는 자로 살면 된 것입니다.

자는 예수님의 속죄의 능력과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미 죄없는 자로 선언되는 의의 자리, 은혜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에 대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마땅히 증거 해야 할 복의 모습을 상실한 자로 살아가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예수 안에 있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인간의 본능은 죄를 즐겨하고 있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죄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단번에 죽으신 그 죽으심 때문에 죄가 나를 사망으로 끌어가지 못하는 놀라운 은혜를 마음껏 누리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속죄의 은혜는 자신이 헤어날 수 없는 죄 안에 있음을 뼈속 깊이 자각하는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우리를 죄를 아는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은혜는 말 그대로 푸른 초장입니다. 이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목자 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풍족히 얻는 것을 푸른 초장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는 자들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풍족히 가진다고 해도 결국 멸망의 자식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만을 바라보는 신자에게 푸른 초장은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은혜 안에 거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부족함이 없습니다. 자신을 보고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전혀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자리에 와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를 보지 마시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행하는 예배, 헌금, 기도, 봉사, 이런 것들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러한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귀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에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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