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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으로 노아는

본문 / 11: 7

 

1. 믿음의 증거

믿음은 보이는 것을 손에 쥐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와 실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 믿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신자가 세상의 것을 복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와 실상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에 천국을 보지 못하고, 천국을 보지 못하기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가치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또 믿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한마디로 지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위에서 온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이 없으면 우리는 자꾸만 성경에서 나오는 믿음의 내용들을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5:17-20)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실체입니다. 사람은 하나니 보시기에 더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일들이란 하늘의 일이 아닌 오직 땅의 일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존재인 사람이 믿음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을 동원하고 이용하여 땅의 삶을 유익하게 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창세 이후에 인간은 더 나아가서는 모든 나라는 자신들의 확장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세계는 이런 세상이 정죄 받아 멸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땅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아벨이라는 의인의 피를 흘린 저주스러운 땅이기에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에녹은 경건치 못한 이 세상이 심판받는다는 계시를 받고서 선지자로 증거 하다가 이 땅을 떠나 버렸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지난주에 본 유다서에서 심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셔서 경건치 아니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예언을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한다는 예언을 하면서 자신도 세상에서 자녀를 낳고 살았습니다만 항상 에녹의 초점은 이 경건치 아니한 세상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렇게 300년을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산 사람의 모습입니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노아라 하였으니 이는 안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 참된 안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세상의 심판과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간에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죄악이 가득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정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악한 것도 있고, 선한 것도 있기에 악은 억제하고 선을 북돋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전적으로 악하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고, 법이 필요하고,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악을 제어하고 선을 장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인간이 전적으로 악하지 아니하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는 그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 때에 물로써 그런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이후인 창세기 8장에 보면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8:20-21)라고 하십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인간이 별반 달라지지 아니하여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세상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이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그런 믿음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망하면서 그 보이지 않는 세계가 가치 있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는 신자가 보이는 세상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면서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또 그것을 얻고자 믿음을 동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런 모습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믿음이 없다고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다루어 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일을 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을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그들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인해 우리 자신이 과연 믿음에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2. 노아의 믿음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11:7)고 말합니다.

노아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그 심판에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고 합니다. 이 악한 세상, 즉 사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의 성공과 자신의 이름만을 위해 모두가 멸망할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데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그 시대의 의인이며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입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며 은혜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 노아에 대해 히브리서는 증거하기를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이란 장차 있을 홍수 심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로 받은 그 말씀이 지상에 이루어질 그 어떤 조짐도 아직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방주를 만들고 있을 동안에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노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를 만드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함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도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삶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까? 믿음의 사람 아벨과 에녹과 노아를 보니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셔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받을 세상을 목표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삶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겠습니까?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2:5)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노아가 의를 전파하였다고 합니다. 그 의란 여호와의 심판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려 120년간이나 하나님의 심판 유예 기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중 단 한 사람도 방주에 함께 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습니다.

노아가 의를 전파하였다고 하는 것은 전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전도를 왜 그 시대 사람들은 듣지도 않은 것입니까? 노아의 열심이 부족해서입니까? 아니면 기도를 하지 않아서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노아의 전도 내용이 이 세상이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할 것이라고 하는 전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노아처럼 전도하고, 에녹처럼 전도한다면 과연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가 에녹이나 노아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이 모두 다 불살라져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의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다 세상에서 오는 것이면 정욕 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전도를 계속한다면 사람들이 듣겠으며 또 그런 전도를 하는 교회에 교인들이 모여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은 자로서 방주를 예비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에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믿는다는 말은 하면서도 방주를 예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경고는 현실이었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그 어떤 증거도 보이지 않는다 해도 노아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판이 임할 증거가 보이지 않기에 심판에 대해 의심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과 증거를 떠나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 자체가 노아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홍수로 망한다고 했을 때, 세상은 상식과 과학을 동원하여 그 말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론은 허황된 말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홍수로 망한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문명과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도 더욱 과학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그 어떤 징후도 찾아볼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고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쯤으로 치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는다고 하는 신자조차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는 역시 보이지 않는 일이고, 나중에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기기에 하나님의 경고를 현실로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자기 현실의 전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의 삶은 경고를 예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재에 치우쳐 살아가게 될 것이 뻔한 것입니다.

당시 세상은 방주를 예비하는 노아의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은 노아 외에는 믿음이 없기에 믿음으로 사는 노아의 삶이 세상이 볼 때는 이해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사는 노아를 싫어했을 것입니다. 평안한 세상에서 한평생 평안하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지 뭐 때문에 쓸데없이 조용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평안한 세상을 시끄럽게 하려고 하느냐는 시각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심판을 경고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노아가 받았던 경고를 오늘날 우리가 받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심판의 경고는 노아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아직 보지 못한 일입니다. 언제 심판이 임할지 알 수 없고 또 심판이 임한다는 그 어떤 징조로 여길만한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연재해가 있고, 이상기후가 있고, 지진도 있고, 전쟁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것으로 세상이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심판 자체를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아무리 과학으로 무장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모두가 모래 위에 쌓은 것에 불과할 뿐임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과학이 이 세상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또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심을 믿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보지 못한 일에 대한 경고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고를 현실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노아처럼 방주를 예비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신자가 방주를 예비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날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방주를 예비하는 삶이라고 해서, 특별히 해야 하는 삶이 따로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노아와 같은 심정이어야 할 것입니다.

 

3. 신자와 정죄

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것은 자연히 세상을 향한 정죄가 되었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11:7)고 하는데 여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방주를 예비하는 노아의 삶이 세상을 정죄하는 외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세상을 향해 너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망할 것이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방주를 예비하는 노아의 행위가 세상을 향한 정죄의 외침이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너희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믿지 않으니 결국 심판에서 건짐 받지 못할 것이다는 외침이 노아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보면서 하나님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노아와 같은 믿음이 있는 자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자도 세상을 향한 소리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묵묵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정죄의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 있는 백성을 찾는 소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판을 믿지 않는 세상은 방주를 예비하는 노아의 삶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닷가에서 방주를 짓지 않고 육지에서 짓는 것을 볼 때 그것을 과연 어떻게 평하겠습니까? 정말 미련한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 믿는 것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의 심판이 없다면 모두 헛된 일로 끝납니다. 괜한 수고를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 등 이 모두가 세상의 멸망이 없다면 쓸데없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은 심판을 믿지 않고 보지 않기에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방주 없이도 세상을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경고가 눈에 보이는 현실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참으로 지혜 있는 자가 누구인가가 증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믿고 그 일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가 진심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고를 따라 세상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고를 따라 세상을 보게 되면 자신이 해야 할 일,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그들의 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경고가 현실입니다. 보이는 것은 헛된 것이고, 사라질 허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보이는 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께 보이는 것을 구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헛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 영원한 것을 구하는 것이 믿음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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