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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본문 / 11: 8-10

 

1. 주체

우리는 대개 믿음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힘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이라는 힘을 주신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믿음이 주어진 이후에는 믿음의 주체가 내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일단 믿음이 주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믿음을 책임지고 지키고 관리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으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믿음의 행위라는 것에 눈길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있는 자신을 봄으로써 자신의 믿음에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믿음이 있는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선물하신 믿음이 나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간 결과인 것입니까?

믿음이 있는 나의 순종으로 본다면 결국 말씀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믿음의 행위라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행위가 곧 말씀에 반응하는 흔적이고 증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대다수의 교회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나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그 순종을 나의 반응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나를 이끌고 있다면 이미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 안에서 죽고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기에 나의 행위 또한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한다면 믿음의 열매라는 차원에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경우에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나는 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나를 이끌어 간다면 나는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조종받는 로봇과 같은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믿음이 나를 붙들어 이끌어 간다는 것은, 가지 않으려는 나를 강제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의 모든 생각과 사고와 소망을 새롭게 함으로써 말씀을 따르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새롭게 된 나는 이미 가 아니기에 나는 믿음 안에서 죽고 없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없이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결국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즉 믿음이 그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그들이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고 또 그게 그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말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주체를 누구에게 두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믿음의 세계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브라함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일 정도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임을 굳게 세워주고 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의 주체를 아브라함에게 두게 된다면 결국 아브라함의 행위가 부각이 될 것이고 또 그러한 행위가 있는 아브라함 자체가 높임을 받게 될 위험이 있음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믿음을 가진 자로서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내가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내 자신이 믿음에 붙들려 있는 자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즉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은, 믿음을 받아서 그리고 소유해서 그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아서 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구출하여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자로 살아가는 세계로 집어넣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은 나를 새롭게 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이러한 세계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어떻게 살까?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어떻게 어떤 길로 이끌어 가는가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믿음은 한 개인의 믿음의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계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야할 길과 아브라함의 앞일에 대한 모든 계획을 알려주고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고 합니다. 여기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은 다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만 하신 것입니다. 지시한 땅이 아니라 지시할 땅이라는 것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모른 채 떠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라고 합니다. 즉 젊었을 때가 아니라, 힘을 쓰지 못할 늙었을 때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 어떤 생각을 하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말씀대로 했을 때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모두 접어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을 떠나는 것, 이것이 믿음이 이끄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계는 우리에게 참으로 생소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음의 세계로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서의 종교 생활 그리고 세상에서는 적당히 착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가보지도 또 가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데 떠나라는 말씀 하나에 모든 것을 버리게 하고 떠나게 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러한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이러한 믿음에 분명 반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를 고치면서 붙들어 가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에 붙들려 있는 삶, 이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믿음에 붙들려 있기에 다른 길로 가려고 발버둥 칠 때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길에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어떠함과 악함을 익히 아신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부르신 것이 얼마나 큰 복이며 은혜이며 사랑인가를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3. 부르심

우리가 앞에서 읽은 창세기 12장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결국 분리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분리는 결국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리란 우리가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 왔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계속된 분리입니다. 우리가 늘 붙어살고자 하는 땅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부르심 속에는 순종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흙으로 지어진 바 되고, 세상에 속한 인간들 중 그 누가 그런 부르심에 응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가 이미 믿음의 일이며,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가 믿음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 안에 순종도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효한 부르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8-30)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그 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며 또 그것은 이미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표이며 방향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마치 종합비타민처럼 부르심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흔히 말하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다는 내용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실 때에 순종하느냐 아니냐의 여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고 또 오늘날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17:14)라고 합니다. 짐승과의 싸움에서 어린 양이 이기십니다.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기에 이기시는데 그와 함께 있는 자들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신 분과 함께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부르심을 입어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진실한 자들이며 또 이들이 이긴 자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르게 안다면 이 말씀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새롭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받을 영원한 기업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나라임을 알고 나그네로 살게 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만약 그 아들의 나라를 사모하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목표로 살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부르심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단지 육적인 눈으로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기의 소원을 이루고자 할 뿐입니다.

 

4. 거짓 믿음과 믿음이 하는 일

그런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힘이 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잘 살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착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자기에게 있는 상식을 가지고 생각한 결과인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은 언제나 자신의 형통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잘되게 하시는 분을 참된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우상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나라는 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집을 버리고 떠나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떠난 자로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의 본토 나의 집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본토 나의 집이 있음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빙자해서 세상에 자신의 집을 탄탄하게 세우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의 소유는 없음을 알게 합니다.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배상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상법을 이용해서 피해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쉽지만, 사실 배상법은 피해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향한 규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해자란 없습니다. 무엇인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나의 것이라는 것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의 소유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피해를 입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해자는 있지만 피해자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해를 입었으니 배상하라는 요구를 할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특이성입니다. 배상은 피해자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분의 마음에 달린 나라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9)라고 말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남의 나라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내가 몸 담고 있는 세상을 나의 나라로 보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로 살게 합니다. 믿음에 붙들린 신자라면 믿음에 의해 그러한 삶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를 편안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게 붙들어 놓기 위해 인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이 일에 100%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하늘나라와는 상관없는 존재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힘들고 어려움이 있을 때 내가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그러한가?’라는 의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어려움이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내가 뭔가 한 게 없어서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세계의 맛을 보지 못한 못난 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은 신자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시고, 믿음의 세계로 부름받은 무한한 이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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