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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본문 /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11:23)

 

1. 왕이신 하나님

믿음이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유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추구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보여준 것은 눈에 보이는 고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8:24-25)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보이는 것이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는 것이기에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의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그런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지기 까지 오래참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에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5:7-11)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오래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이란 오래 참고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조짐이 보이는 것이라면 기다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금씩이라도 무슨 징조가 보이면 기다리겠는데 아무런 징조가 없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에 태풍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로 집과 사람들이 떠내려가고 하였다면 몇 사람은 노아의 방주에 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런 조짐이 없었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고 나서 7일 후에 비가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언제나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하시는 것이기에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제대로 기다리고 대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까지만 하시고 그다음에 믿고 난 후부터 주님의 재림까지는 너희 실력으로 오래 참고 기다리며 예수님을 맞이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취하시기까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라고 하시고서는 그 말씀대로 기다리기에는 우리가 너무 연약하기에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연약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8장에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고 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마땅히 빌어야 할 바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여야 할 것은 하지 아니하고,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은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까닭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오직 보이는 것만 소망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기도 내용 중에 과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빼내어 버리면 기도의 제목이 얼마나 남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거의 기도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로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성령이 오셔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8:27)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께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고집하며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도록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도달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자 하게 됩니다.

신자에게 있어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신자에게 있어 하나님이 왕이라는 호칭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신자의 모든 주권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주권에는 죽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는 것과, 생존을 유지시켜 주시는 것과, 외적인 모든 문제에까지 개입하시고 간섭하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은, 인간들 위에 군림하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삶과 죽음의 주인이시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두려움의 대상은 없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왕이라고 호칭하면서 또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두려움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왕으로 인정해 주는 것일 뿐 왕과 백성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2. 모세 부모의 믿음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11:23)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낳고 석 달 동안 숨겨야 했던 이유는 잘 아실 것입니다.

요셉이 죽은 후에 애굽에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극을 합니다. 이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고 창대하여 심히 강대하여지자 이스라엘에 대하여 경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장에 보면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1:16)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 히브리 산파들이 애굽 왕의 지시를 따르지 않음으로 바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1:22)고 하는 또 다른 왕명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죽이지 않고 감춥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숨긴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다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말한 아름답다는 것은 용모가 아름답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출애굽기 2장을 보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2:2)라고 말을 하지만, 그 역시 단순히 용모의 빼어남을 의미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갓 태어난 아이들의 용모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용모는 자라가면서 달라지고 차이가 나는 것이지 사실 갓 태어난 아이들의 용모가 얼마나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단지 잘 생겼기에 죽이기가 아까워 숨긴 것으로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어떤 의미의 아름다움일까요?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은 항상 아름다운 법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라 할지라도 다른 아이보다 내 아이가 더 잘생겨 보이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름다움을 보고 숨겼다고 말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내포한 의미의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당시 모세의 부모가 처한 상황에서 본다면 바로의 명령, 즉 아들이거든 죽이라는 명령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명령을 어겼을 때는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를 숨긴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두려움조차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겠습니까? 모세 부모가 믿음으로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으로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살라는 권면을 위해 모세 부모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담대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를 하기도 하지만, 믿음이 담대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얼마든지 담대할 수 있는 믿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는 단순히 복을 주고 복을 받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거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또 신자는 그의 자식으로서 만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왕으로서 또 신자는 그의 백성으로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자로 사는 신자라면 다른 두려움의 대상은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다면, 그것은 힘에 의해 자신에게 다가올 어떤 결과를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는다면 결코 세상의 어떤 힘도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을 해할 수 없고 또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해할 수 없음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음으로 자연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어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는 비밀의 세계이며,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는 증명이 필요 없고 과학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고 또 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의심이 없이 마치 본 것처럼 확신이 되는 것이야말로 믿음이라는 은혜의 세계이며, 능력의 세계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세계에 들어와 있는데 어떻게 보이는 것으로 인해 두려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그분이 나의 아버지임을 믿는다면 어찌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러한 관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기에 세상의 힘에 대한 두려움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믿음의 세계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거기에 엎드려 절하라고 하면서, 만약 누구든지 절하지 아니한 자가 있을 때는 풀무 가운데 던짐을 받을 것이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하지 않음으로서 느부갓네살의 분노를 사게 되고 결국 풀무불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은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3:15)는 말을 합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이러한 말은 충분히 위협이 되고 두려움이 될 만한 말이었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16.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6-18)라는 말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위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어떤 위협을 가한다고 해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설사 죽는다 할찌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죽는다는 것이 자신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인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냥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신자는 세상의 어떤 힘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원해서 맺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라는 사명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붙드시고 계시는 이 관계는 세상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 관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그래서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3. 신자의 삶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믿으려고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슴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나의 왕을 외칠 것이 아니라, 왕이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을 왕이라고 할 때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되심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는 백성으로 택함받고 부름을 입었음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대단한 것임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두려움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두려워 할 것이 없는 존재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으로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설사 우리가 엉망으로 산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관계를 단절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애당초 우리의 악함을 다 아시면서도 이루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에게 뭔가를 기대하시고 맺으신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섭하시면서 고쳐 가시는 것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게하기 위해 날마다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는 관계 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혼이 나도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버지께 매를 맞아도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시는가?’라는 불평과 원망을 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각한다면 이렇게 살게 하신 것에도 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생각이 있음을 알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신자는 두려움이 없게 됨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믿음은 키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떠내려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시고 인간은 누구인가? 과연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분이시며 인간은 또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존재인가를 물으시며 하나님을 믿어주는 식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제가 있고 하나님을 앎으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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