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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으로 모세는

본문 / 11:24-26

 

1. 환상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고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산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인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게 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를 대하는 수신자들이나 오늘날 우리 또한 그 믿음을 하나님께 선물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함을 말씀함으로써 우리가 지금 믿음의 사람들처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인지를 보며 우리 믿음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에 대하여 심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환상은 믿음이 자신들이 꿈꾸는 삶을 이루어 주며 또한 자신이 꿈꾸는 행복한 삶으로 인도해 갈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도 세상이 말하며 꿈꾸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즉 풍족하고 염려와 걱정이 없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삶은 자신의 힘과 또 자신의 현재의 조건으로는 도무지 얻거나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막연하게나마 신에게 기대를 걸어보기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우리의 환상인 것입니다.

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사람들이 종교성과 상상으로 만들어 낸 가짜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만으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기에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6-9)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교회, 즉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서입니다. 여기 보면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 다른 은혜, 다른 복음을 좇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복음은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고 합니다. 복음과 복음 아닌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냐로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른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하게 거부하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참 복음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하는 기쁨과 하나님이 구하는 기쁨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구하는 기쁨은 모두 세상과 연관이 있지만, 하나님의 기쁨은 철저하게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른 복음은 누가 만들어내는 것입니까? 물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마가복음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7)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8:28)고 답을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많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신 일로 인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통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8:29)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고 답을 합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맞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과연 베드로의 이 답이 정답을 말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만 생각한다면 베드로는 분명 우리의 생각처럼 맞는 답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답한 그리스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말씀을 보면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8:30-31)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8:32)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33)라고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오히려 예수님께 사단이라는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렇게 대화의 흐름을 보면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십자가 사건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기보다는 베드로가 고백하고 있는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말한 것은 맞지만 베드로가 그 고백에서 생각했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리스도 아니기에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드로가 고백하며 생각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 그리스도가 맞는다면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대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는 참된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무관한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항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십자가 지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리고 이것이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는 당시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런 사고로 무장되어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이 있는데 그 복음은 인간의 원하고 기뻐하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만 있는 것입니다. 오직 땅의 것만을 기쁨으로 여기며 사는 인간이기에 그런 인간은 하늘에 속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전파라는 핑계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고, 그들은 복음을 사람이 얼마든지 이해하고 환영할 수 있는 말로 바꾸고 변질시켜서 결국 다른 복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고 한 것처럼 그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해야 할 일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제 아무리 참 된 복음이라고 해도 자신의 이성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은 전파에 대해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는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하여 믿는 자가 많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이 사도 바울 자신의 말과 자신의 사람의 지혜로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말미암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초월하여 주어지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것은 사람의 말과 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너희 믿음이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최고의 기적입니다.

복음에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에게 대가로 주어지는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세상의 행복과 성공 같은 그런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간증, 즉 소위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믿음의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으로 인해 무엇을 얻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얻게 될 선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길

오늘 본문에 보면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11:24-25)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 역시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 내용과 비교해 보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장성한 모세가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함으로 바로를 피하여 도망을 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모세가 스스로 바로의 공주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실과 다른 히브리서의 내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해 드렸습니다. 이 내용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만 이해가 되는 것이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만약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처음부터 오늘 본문의 내용대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영화를 누리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더 좋아했다면 어떤 식으로 해석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모세의 행동만이 부각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믿음의 행동을 보여준 모세는 있을지언정, 하나님에 의해 고침받고 다스려지면서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는 모세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전지전능하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또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고침 받으며 또 어떤 인간으로 바뀌게 되는가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마음에 두고 사는 인간은 없습니다. 모세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믿음의 모습을 보였다면 그것은 그들을 고치시고 바꾸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결과일 뿐인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로 인해 증거되는 것은 믿음으로 산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인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치게 된 것도 모세가 재수가 없어서 들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일입니다. 모세를 하나님의 일을 맡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물론 모세가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세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손해입니다. 애굽의 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을 하나님이 박탈해 버리신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세를 향한 이 같은 하나님의 계획이 없었다면 모세는 애굽에서 편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인생이 달라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인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당장 애굽에서 도망칠 때는 자신이 애굽에서 도망을 쳐야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모세를 이렇게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다고 해서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의 좋은 것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고 환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인생이 세상의 영화가 아닌 고난으로 이어졌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만난 신자의 삶은 세상의 영화와는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생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인생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무작정 믿음에서 행복을 꿈꾼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영광을 거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삶을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택하는 길은 분명 고난이 아니라 세상적 영화입니다. 이것과 반대된 길이 믿음의 길이기에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우리를 붙들어 이끌어 가는 길인 것입니다.

러므로 누군가가 주님이 내신 고난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자랑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와 결단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믿음이 이끈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열심이고 의지며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래서 본문을 가지고 우리도 모세처럼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택하고 살아갑시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이 우리를 고난의 길로 이끌어 갈 때 순종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말을 할 뿐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나라는 존재는 고난의 길에 순종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만날 것은 분명 손해며 고난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긋남을 거부하고 진리의 정신으로 살려고 할 때 세상은 우리에게 절대 박수를 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과 타협하지 않음으로 인해 온갖 불이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3. 더 큰 재물

그런데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굽의 모든 보화란 세상 최고의 보화들입니다. 단지 금은보화만이 아닙니다. 최고의 문명이며, 최고의 기술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이 다 있는 곳이 애굽인 것입니다.

그런 애굽의 보화보다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정상적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맞습니다. 믿음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이 볼 때는 정상적일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믿음에 붙들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교회 출입하고 예배드리고 헌금 조금 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게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상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나은 상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금은보화나 부귀영화는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 상이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의 세계를 위하여 눈에 보이는 세상의 최고의 가치를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상이야말로 세상의 전부를 준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이 상으로 인한 수모를 더 큰 보화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소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자신을 좋게 하는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끌어당기시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아닌 하늘을 보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애굽을 그리워한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지금의 현실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면 애굽보다 더 좋은 것이 기다릴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기 위해 그들을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게 하기 위해 나오게 하신 것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환상은 실망과 원망만을 만들어 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환상에서 벗어나서 참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인도받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우리의 의지와 각오를 가지고는 순종할 수 없는 믿음의 삶에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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