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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본문 / 11:27

 

1. 믿음으로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는데 왜 믿음이 필요한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야 한다면 그냥 자기들끼리 의견을 모아서 떠납시다하고 떠나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의지로 애굽을 떠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이라는 강대국에서 노예의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떠나고 싶다고 해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 혹 이런 이유로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겠습니까? , 자신들끼리는 애굽을 떠날 힘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애굽을 물리쳐서 떠나게 하신다는 의미로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이러한 의도에서 이해를 하기도 합니다. 내가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대신해 주심을 믿는다는 의미에서의 믿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고 결국 그로 인해 바로가 여호와께 굴복하여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이기에 그러한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먼저 애굽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우리를 애굽에서 떠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을 애굽에 묻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자들입니다. 자신들은 애굽에서 살다가 끝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야 할 존재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믿음으로라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라는 말은 믿음이 개입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왜 믿음이 개입되지 않으면 애굽을 떠나지를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의지로는 애굽을 떠날 수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의 힘, 즉 믿음이 개입하여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의지로 애굽을 떠나지를 못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야 할 땅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아예 애굽을 떠나야 한다는 의지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 땅에 있는 이스라엘이 날로 번성하자 애굽 왕은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고,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애굽이라면 이스라엘에게 결코 살기 좋은 땅으로 여겨질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애굽이 상징하는 이 세상이 과연 우리에게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우리가 속히 벗어나야 할 세상으로 보이는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세상에 사는 것이 힘들고 또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 내면에는 그런 세상의 것을 고대하고 즐기는 속마음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싫다고 하면서도 싫어하지 않는 이상한 모순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 이스라엘도 그들이 당하는 있는 형편과 상황을 보면 애굽을 살기 좋은 땅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애굽에 있던 것을 그리워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16:3)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며 또 오늘날 우리의 실상인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은 싫지만 애굽에 있는 것은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는 것을 그리워한 것처럼 세상에 있는 것을 원하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떠나려고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이 개입되지 않으면 결코 애굽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몸이 애굽에 붙들린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이 애굽에 있는 것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가 어떤 힘에 붙들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는 것은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방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에서 끄집어내는 능력인 것이지, 인간이 원하고 추구하는 세상의 것을 소유하게 해주는 능력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믿음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착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 믿음에 대한 착각

믿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는 능력으로 주어진 것이지 내 뜻과 계획의 성취를 돕기 위한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말은 믿음에 대해 무지한 자의 어리석은 말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믿음이기를 원하고 이런 우리의 생각이 바로 믿음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9:23)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는 예수님이 제자 3명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신 내용이 있고 그 와중에 산 밑에서는 남은 제자들이 한 아버지가 데려온 귀신 들린 아들을 붙들고 귀신을 쫓아내려 했지만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신 후의 상황에서 나온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도 우리 생각으로 접근하여 말합니다. 믿음은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지 아이의 아버지의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처럼 뭔가 미심쩍어 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이르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막무가내식 신앙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내용은 결코 그런 의미의 내용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928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9:28)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그 당시 제자들의 현실이었고 또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임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단지 귀신들림이라는 병적인 상태를 낫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는 귀신들림이란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지금의 형편인 것입니다. 즉 귀신들림을 단지 정신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의 문제로 바라보게 된다면 예수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귀신들린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들은 귀신의 악한 사고방식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간을 건져내시고 그러한 귀신의 사고방식이 아닌 하늘의 사고방식을 가진 자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이고 뜻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현상이어야 함을 알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 현장에서는 귀신이 쫓겨나가는 일들이 항상 발생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이러한 교회의 사명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사람들도 보면 귀신들림을 단지 정신이상 적인 차원, 즉 육신의 병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볼 뿐 하늘의 방식과 반대되는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귀신들림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신이상자의 증상이 나아지고 병이 고침 받았다는 것만을 귀신이 쫓겨 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현실이었고 그리고 그 현실은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산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들으시고 19절에 보면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9:19)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무엇이 믿음이 없는 모습인 것입니까? 예수님은 무엇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으로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9:29)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기도하지 않은 것을 믿음이 없는 것으로 말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믿음이 있는 신자라는 말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믿음이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할 것이고 또 기도를 함으로써 자기 신앙을 확인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생각할 때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믿음을 능력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신자로 하여금 어떤 능력을 행하게 하는 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신자에게서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능력은 대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는 힘도 아닙니다.

믿음의 능력은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삽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은 오직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또 자신이 아니라 주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혹 믿음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구제불능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악한 모습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믿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믿음의 능력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진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또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이 믿음의 능력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십자가의 능력은 무시하고 오직 눈에 드러나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상만을 능력으로 여기는 이것이야말로 귀신에게 붙들려 살아가고 있는 사고방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는 것은 믿음을 단지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귀신들린 아이를 붙들고 자기 능력을 보여줄 기회로 삼아 행하려고 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 증명을 위한 도구로만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런 물리적이고 신비한 힘을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탄에게 붙들려 귀신들린 채 살아가는 자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사탄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다만 귀신을 고침으로써 자기들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고, 예수님께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현실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여전히 세상에서의 인간의 행복에 매달린 채로 살아갑니다. 몸이 건강하고 재물이 많은 부자로 살면 제일이고, 재물이 없어 가난하고 몸이 병들면 불행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르면서 몸이 건강하고 재물이 많은 부자로 살 수 있는 복을 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손에 쥐기 위해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로 자신을 독려하고 성도들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모든 것이 귀신 들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예수, 즉 나를 부자 되게 해주고 또 내 꿈과 소원을 이루어 주는 바알 하나님을 좇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없는 세대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앞에서 죄로 인해 사망에 처한 우리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귀신들려 살아가는 나를 불쌍히 보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돈 없고 병든 자신 처지만 바라보면서 나는 불쌍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진심으로 불쌍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 때에도 그를 불쌍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 말씀 중에서 믿는 자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망에서 건진바 되었음을 깨닫고 믿는 신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은 사망에 처한 자, 즉 귀신들려 살아가는 자를 불쌍히 여기면서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능력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할 수 있다는 말은 세상이 원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그 심정으로 하게 되는 모든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붙들려 살아가는 세상에 오직 하늘 생명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일에 해당 됩니다. 이 믿음이 사망에 처한 자를 구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자에게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 뜻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마음을 기도를 하면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8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9:28)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9:29)고 대답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하나님이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게 되는 현장인데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또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 능력을 행해보고자 한 그것이 믿음 없는 세대의 모습이고 인간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그리고 기도를 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또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무서워 아니함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11:27)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믿음이 모세를 담대하게 만들어 애굽의 임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마치 간이 큰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힘 있는 자가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고 해도, 그보다 더 힘 있고 강한 분이 나와 함께 한다면 그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왕이라는 강한 힘도 두려움이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어서 보지 못하는 것처럼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결국 상상 속의 존재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해도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전능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같이 하게 합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믿음이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보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야말로 신자에게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하는 강한 힘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간다고 할지라도 나를 해롭게 하지 않으시고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함께 하심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이 만든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어김으로서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느부갓네살이 신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며 그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세 친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건져줄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절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풀무불에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못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결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여기는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게 하는 능력임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 우리의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여겼던 것들은 다만 우리의 착각이었을 뿐입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왕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믿음으로 애굽의 것을 소유함으로 애굽에서 편히 머물고자 하고, 힘 있는 자에게 대해서는 부러움과 함께 힘 있는 자에게 두려움이 있는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믿음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신자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애굽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애굽에 있는 것을 구하며 편히 그 애굽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 열심인 것을 두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그의 열심의 가치를 높여줌으로써 더욱더 향상된 열심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술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교회조차 떠나게 합니다. 교회를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바라보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며 바라보게 할 뿐입니다.

믿음은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끄집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세상에서의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난 자, 즉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인도받음을 아는 신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고백으로 남게 됩니다. 믿음이 나를 이렇게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가 있음을 보는 신자라면 사실 무서울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협할 힘은 세상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보는 결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나약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힘을 무서워하지 않게 하며 세상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으며 가장 강하신 분을 의지하고 어떤 일에서도 담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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