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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으로 유월절 예식을 정함

본문 / 11:28

 

1. 인간의 실체

인간이 자기들끼리 박수 쳐주며 제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도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이라는 굴레를 억지로 씌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은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죄인이라는 선언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다 한다고 해도 인간은 그 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죄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것 자체를 두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5-6)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의 세상의 실상인 것입니다.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라도 왜 사람들 보기에 착하고 좋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이름과 성공만을 위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한 것이고 죄악이 가득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그런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심판 후의 모습은 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8:20-21)라고 합니다.

인간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는 그런 악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물로써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주기적으로 그런 심판을 하셔야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홍수로써 심판 하신 후에 인간이 변하지 않을 것을 모르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기에 분명 아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노아의 홍수는 단지 심판의 의미라기보다는 인간의 실체를 우리에게 알게 하고, 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합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악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창조주인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내팽개치고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악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라면 하나님 앞에 인간은 나라는 존재성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다운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피조물 된 인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존재성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나 우리나 모두 같은 본질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착한 행실도 선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보기에는 선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인 우리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알고 바른 분별을 가져야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시각과 상식으로만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런 우리에게 선포 되어진 복음은 무엇입니까?

 

2. 복음과 거짓 선지자

마태복음 7장에 보면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7:15-18)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좋은 나무에게서 자연히 맺어지는 것입니다. 즉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좋은 나무에게서는 당연히 맺어지는 것입니다.

런데 못된 나무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고 소리친다면 그것은 가시나무에게 포도를 그리고 엉겅퀴에게 무화과를 맺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네가 포도를 맺으면 또 무화과를 맺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거짓 선지자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은 못된 나무로 하여금 네가 못된 나무라는 것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스스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못된 나무임을 알게 하여 자신에 대해 그 어떤 가능성도 두지 않게 하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좋은 나무에게서만 가능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좋은 나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열매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세상에서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며 자신은 믿음이 좋은 자로 또 열매 맺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나무인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에 보면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1-23)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인은 어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좋은 나무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때문에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나무인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악하기에 그 속에서 이러한 더러운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금할 수 있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인가를 알고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선이 없는 것입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선은 오직 선한 분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19:16-17)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선한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래서 선한 일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한가지 가능한 것은 있습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11:17)라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못된 나무인 우리를 꺾으셔서 좋은 나무에게 접붙이신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나무로 인해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은 못된 나무인 우리를 꺾어서 좋은 나무에 접붙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만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못된 나를 붙들고 있는 예수님만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나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게 하시고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증거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신자에게 맺어지는 아름다운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혹 내게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혔다면 그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선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리고 못된 나무가 좋은 나무로 변할 가능성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못된 나무에게 좋은 나무가 되어라고 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거짓 선지가가 말하는 열매는 인간의 종교 행위와 인간의 도덕과 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아름다운 열매로 규정하고, 그 열매로 자신이 좋은 나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복음에는 그 어느 한 부분도 인간을 거스리는 내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선한 행위에 대한 결단을 하게 하고 또한 선에 대한 실천을 통해서 자기 확인까지 하게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에 이제는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의 역사 속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음 받는 아브라함까지도 자기 존재성에 매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그들의 의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매어 살아가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할 뿐인 것입니다.

 

3. 믿음의 사람 모세

오늘 본문의 모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11:28)라고 말합니다.

당시 애굽의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에게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한다는 것은 애굽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부터의 독립은 애굽과 투쟁하여 승리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다는 것은, 모세가 믿음으로 애굽과 투쟁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었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모세가 그런 인물이었습니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고 말씀하시자 모세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4:13)라고 하며 나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또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도 바로가 화를 내면서 오히려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자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결국 이스라엘이 더 학대를 받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않는다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약한 모습을 한두 번 보인 것이 아닌 모세가 결국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되고 유월절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세만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믿음의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하고 의심 많고 흔들리기 쉬운 자에 불과할 뿐이지만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든 야곱이든 모세든 믿음으로 인한 담대함을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솜씨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나약한 모세를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은 애굽의 재앙을 통해 증거되었고, 그중에서도 열 번째 재앙인 장자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무서움과 강하심이 증거되었습니다. 애굽은 장자 재앙에서 하나님의 강하심과 무서움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습니다. 즉 죽음에서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세상은 다 죽어도 이스라엘은 결코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죽음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피로 인한 이스라엘의 강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것이 아니라, 피가 강한 힘으로서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보호한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죽음조차 이기는 강력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문설주에 피를 발라라고 하신 것은 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피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사망까지도 자신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 피의 의미

그러면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는 일에 왜 믿음이 동원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피를 아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장자 재앙은 이스라엘을 죽어서는 안 되는, 즉 하나님의 심판과는 상관없는 존재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구별되었다면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을 방문한 일은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에게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심판과 그 죽음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애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죽음의 천사 앞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어린양의 피만을 바라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피가 이스라엘을 살리는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받고 죽어야 할 자가 피로써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피를 믿는다는 것은 죽어도 마땅한 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강력한 능력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도 어찌하지 못하는 능력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는 죽음조차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를 믿는다는 것은 강한 것이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고 남보다 더 가지지 못한 것 등으로 신세 한탄을 한다면 그것은 피라고 하는 강력한 능력 아래 보호 받고 있는 신자의 가치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기다리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셨고 또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무능력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재앙을 그들의 힘으로 막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종이었던 나약한 이스라엘이 애굽이 막지 못한 그 재앙을 이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바로 그 피를 믿고 있습니다. 피를 믿는 이 믿음이야말로 신자에게는 힘이고 위로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죽으면 천국 가게 한다는 보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신자인 우리를 보하시고 지키신다는 확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를 믿는 것은 죽어 마땅한 자가 생명을 얻었음을 믿는 것이고,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나를 사망으로 이끌어 가지 못함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하여금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 두려운 것이 많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에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에 담겨 있는 강함과 담대함의 의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를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을 보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피를 믿는 자는 세상이 감당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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