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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더 좋은 것
본문 /  히11:39-40

1. 어리석은 현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세상은 사탄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밀려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탄의 활동을 하나님이 허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어두움의 세상이 사탄, 즉 악한 영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묵인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탄의 사고방식에 순종하여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을 말할 때 사탄을 아주 악한 존재로 연상하게 됩니다. 물론 사탄이 악한 존재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이 ‘악하다’고 규정하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는 악함을 우리가 생각하는 악함으로 이미 규정지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악함으로 인해 우리는 사탄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규정 지어 놓고 있는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도록 유혹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살인, 강도, 도둑질, 사기, 유괴 등등의 이런 나쁜 짓을 일으키는 것이 곧 사탄이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반대로 착한 행동은 항상 천사와 연관 짓습니다. 그래서 흔히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도 그가 남을 돕는 일을 많이 하고 또 성격이 부드러운 등의 조건을 보고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탄의 교묘한 자기 위장인 것입니다. 
선악을 예수님을 기준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기준하여 판단하게 함으로써 세상의 윤리와 도덕에 자신을 감추어 놓고 있는 것이 사탄의 술수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탄에게 붙들려 있는 세상 사람들 역시 사탄과 마찬가지로 윤리와 도덕적인 삶으로 자신을 위장하며 그럴듯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악한 것으로 이야기한다면 세상은 분명 인정하지 않고 발끈할 것입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말하는 교회에서 조차도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부정하는 말이라며 함께 발끈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어둠의 세계가 표방하는 세상의 의로 포장하려는 악한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함에 묻혀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탄에 붙들려 지배받는 상태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악에 대한 분별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한 어둠의 세계에 대한 바른 판단 역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계를 깨뜨리고 굳게 선 예수님의 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오로지 어둠의 세계 속에서의 자신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좋은 것이란 오직 자신의 가치를 향상 시켜주는 모든 조건과 수단들로 여겨질 것이 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의 악한 영의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함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못하고 오직 자신이 꿈꾸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예수님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오직 세상만을 바라볼 뿐이며 또 그 세상 속에서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2. 더 좋은 것
이런 세상에 몸 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11:39-40)는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말씀들이 과연 어둠의 세상 속에서 세상에서의 좋은 것만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관심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과연 세상의 좋은 것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관심이 될 만한 내용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9절에 보면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을 하지만 과연 이 말이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오늘 본문 40절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말에는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악한 영이 이끄는 방향대로 또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좇아 해석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문맥 그리고 그 의미와 하나님의 마음 등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말씀을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오직 내게 좋은 것이 우리에게는 더 관심거리이고, 하나님의 뜻조차도 오직 자신의 관심거리 속에서 해석을 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 하늘의 사고방식으로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누리려고 하고 또 세상의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시면서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어둠의 세계의 실체를 제대로 보게 하시고 그래서 악한 영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셔서 그러한 사고방식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지식과 지혜로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철저히 가려져 있는 비밀로 주어지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알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즉 아무나 천국에 올 수 없도록 막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는데, 과연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오늘 본문 39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11:39)라고 합니다. 여기서 증거를 받았는데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옛 언약의 증인들, 즉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로 증거된 사람들이 증거는 받았지만 그 믿음의 실상인 약속된 것은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증거는 무엇이며 약속된 것은 무엇인지 또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먼저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증거와 약속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기는 합니다만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과연 성경에서 증거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서도 설교를 합니다만 그 약속이란 것이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약속들만 말하고 듣기를 좋아한다면 성경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내용을 다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또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부터 보면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는데 그 약속하신 것이 주어진다는 증거는 받았지만 그 약속의 실체는 받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 실체를 받지 못한 것입니까? 2절에 있는 선진, 즉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새 언약의 완성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러 언약들이 나타납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하신 언약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는 새 언약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언약들이 결국 새 언약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데 그 새 언약의 실체에 대하여 증거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본문 40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11:40)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더 좋은 것이란 새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는 이 수많은 증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그 어떤 인물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마11:9)고 하며 또 11절에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합니다. 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합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서 증거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몰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죄 사함을 받아야 가는 나라인데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증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인데 그 증인들의 정점에 바로 세례요한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세례요한이 더 큰 자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열리는 천국에서는 그를 믿고 천국의 백성이 된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성도들보다 신분이나 지위가 더 높아서 하늘에서 더 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신 그 언약의 완성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그 피를 그림자로 믿는 자들과 실체로 믿는 자들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 하에서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함을 이룬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같은 죄인이 오직 그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의 온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또 그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도 없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성령의 법에 소속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완성인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11장을 마무리하면서 구약에서 약속의 실체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 증거들만 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의 믿음으로 받은 증거들이 어떻게 약속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인지를 다시 보겠습니다. 그동안은 히브리서 11장의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전체를 한꺼번에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커다란 퍼즐이 있는데 그 퍼즐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구약의 성도들이 퍼즐의 한 조각씩 맞추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성된 그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전체 퍼즐은 한 조각을 맞춰가는 것이라면, 신약의 성도들은 가만히 있다가 맞춰진 전체 퍼즐 그림의 완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3. 퍼즐 맞추기
먼저 아벨을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제물과 제사가 함께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고서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로서 제사를 드리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증인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4)고 합니다. 아벨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물로서 제사를 하나님의 드렸다고 해도 그런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신이 제물되시고 하나님 앞에 예수님 자신의 피를 뿌리셨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아 방주를 예비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구원의 방주가 되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세상의 정죄에서 구원을 받고 의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방주는 모형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이 구원의 방주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고 말하는데 틀린 이야기입니다. 교회 나와서 죽도록 봉사 충성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산 이유는 더 나은 본향, 즉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그 아들의 나라를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그 나라의 왕이요 주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이삭을 통하여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의 복인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 취향대로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축복하려고 하였으나 축복이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만 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원한다고 달음박질 한다고 가는 곳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야망이 꺾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되는 것이 참된 복임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그 손을 어긋맞게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인간의 소원과 다름을 보이셨습니다. 오직 그의 약속대로만 주어지는 것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그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키실 때에 자기의 해골을 메고 나가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영광과 보물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나은 보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한 것의 모형과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습니다. 
사사들과 선지자들을 다 말하자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칼날을 피하기도, 죽을 자를 부활로 받기도, 또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고, 희롱과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치는 것, 톱에 켜임, 궁핍과 환난과 학대, 이 모든 것들이 다 증거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퍼즐이 완성되고 보니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사실입니다. 

4. 신자된 우리
오늘 우리는 이렇게 분명하게 완성된 약속을 받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그 야속의 증거물로 한 조각의 퍼즐을 가졌다면 우리는 완성된 그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구약의 증인들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회개할 일 외에 달리 없지 않습니까? 퍼즐 한 조각을 가지고도 자신의 목숨을 버렸는데 우리는 완성된 그림을 들고서 다른 것을 기웃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0-22)고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고 아멘인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사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주신 것은 구약의 그 어떤 증거물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받은 은혜며 복인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게 되는 것입니까? 먼저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고 누리며 사는 은혜를 알게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여정이 은혜임을 알고 고백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10)고 합니다. 
한마디로 죽기를 바라는 것, 즉 주와 함께 거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약속의 실체를 성령의 보증으로 받은 사람들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험할 수 없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함을 입어 의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으로도 온전케 될 수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케 되어 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악한 영의 세계, 즉 악한 영의 사고방식에서 구출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결코 어둠의 세계에서 우리를 굳게 세워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믿음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탄의 사고방식에 의해 생산된 거짓 믿음일 뿐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나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형편과 조건이 힘들고 어려워도 변함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로 인도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세상도 감당할 수 없는 신자의 강건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에 머물게 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징계하기도 하시고 또 매를 드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 좋은 것으로 채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처럼 왜 나에게 예수님이 좋은가를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긍휼도 결국은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세상에 시선을 두면서 세상 것을 기준하여 사랑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분으로 존재할 때, 예수님을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왜 하나님이 하나님만을 믿고자 하는 자기 백성을 힘들게도 하시고 고난으로 이끌어 가시는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모든 일들은 결국 온전치 못한 나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들어 놓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며 그래서 범사에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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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 2022 2월 27일 / 히브리서 66. (히 12:12-2) 온전케 하시는 이 관리자 2022.02.27 178
587 2022 2월 20일 / 히브리서 65. (히 12:1-2) 예수를 바라보자 관리자 2022.02.20 227
» 2022 2월 13일 / 히브리서 64. (히 11:39-40) 더 좋은 것 관리자 2022.02.13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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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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