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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본문 / 12: 3

 

1. 관심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사람과 충돌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람의 관심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생각이 달라서 서로 충돌이 되더라도 서로 타협하고 양보하고 조율도 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타협과 양보와 조율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관심을 받아들일 의도는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심거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가에 대하여서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오직 나의 관심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충돌이 없다면, 내가 생각하고 내가 믿고 있고 내가 찾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해봐야만 합니다. 또한 그런 내게 선포 되어지는 말씀에 대해서도 의심을 해 봐야만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관심이 만들어 낸 거짓 하나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관심에 들어오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관심에 끌려가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를 못한다면 우리는 바른 신앙에 머물 수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관심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다면 누구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이 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착각은 인간이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일에 신이 관심을 가지고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종교성이 만들고 세상이 원하는 우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나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으로 뒤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거듭남이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나의 중심에 있음을 발견할 때, 신자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생각하라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12:3)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생각하라고 말씀하는 그분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처럼 본문 앞의 2절에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하고, 오늘 본문인 3절에서는 예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심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이라는 단어에 우리의 관심거리 모두를 담아서 하나님께 요구하지만 그러한 복의 내용조차도 성경과는 일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것을 복의 내용으로 담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것을 복의 내용으로 담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복을 베푸시려는 하나님과 세상의 것 즉, 땅의 것을 복이라 여기며 요구하는 우리는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옛사람으로서의 생각과 관심이 깨어지지 않는 한 그런 사람의 신앙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또 하나님은 그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생각과 관심이 깨어짐으로써 다시 말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짊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각과 관심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해 묵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고생이 없는 편안한 삶을 꿈꾸며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십니다. 즉 고난을 받으시되 모든 것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써 인간이 고생 없는 편한 인생을 꿈꾸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옳은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의 문제보다는 온통 자기 자신의 생존 문제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늘에 속한 진리는 인간의 생존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확실하게 인기 없는 분으로 전락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속한 진리에 관심이 없는 인간에게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역시 무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이기에 그런 인간이 혹 십자가를 말한다 해도 그가 말하는 십자가는 인간의 관심거리를 담아 놓아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천국이든 또는 세상의 복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예수님만을 찾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고난을 받고 죽으신 예수님을 세우시는 이유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우리의 고생은 사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라고 하는 의미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피곤과 낙심이라는 말은 인간이 좋아하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해 쉽게 피곤해지고 낙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은 내가 원하는 인생도 아니며, 내가 꿈꾸는 삶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피곤과 낙심은 인간이 삶의 재미를 잃었음을 뜻합니다. 인간이 찾는 삶의 재미는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충족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원하지도 않는 고난과 어려움이 주어지게 되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삶의 재미가 사라지게 되고 그것이 피곤과 낙심으로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12:3)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2절 말씀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이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것은 삶의 즐거움 자체가 달라져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삶의 즐거움이 온통 세상을 향해 있는 자에게는 참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혹 있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피곤과 낙심만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추구하는 인간이 원하는 삶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의 즐거움을 하늘에 둔 믿는 신자라면 세상에서의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참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오늘 본문은 고난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신자의 즐거움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 역시 피곤하고 낙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현재의 형편을 생각하면 사는 것이 피곤하게만 여겨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늘 말씀처럼 환경과 형편의 문제라기보다는 즐거움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만약에 삶의 즐거움을 온통 세상을 향해 있다면 그 세상에서의 삶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세상의 것을 마음껏 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세상에서의 그러한 삶이 가능케 해주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런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워지고 또 원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달가운 마음이 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 대해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참된 즐거움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새롭게 정립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시선을 벗어버리고,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솔로몬의 전도서의 고백처럼 모두 헛된 것이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루속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많은 고난과 십자가 위에서도 하늘의 즐거움을 바라보신 예수님과 같이 하늘의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늘의 즐거움만을 바라보게 하시려 우리를 인도하는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감사함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그 의의 현장인 십자가는 자연히 내가 머물러야 할 신앙의 자리로 또 내가 따라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세상에서의 그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피곤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예수님이 참으셨으니 너희도 참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요일 뿐입니다. 신앙은 하라고 요구하는 강요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은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어떤 고난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내뱉는 교훈적 차원의 이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은 단지 좋은 말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전하기를 원하는 복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맹목적으로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즐거움이 십자가의 고난을 참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즐거움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즐거움이 헛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하고, 하늘의 즐거움을 바라보는 것이 믿는 신자로 하여금 참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피곤치 않고 낙심하지 않는 것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헛됨을 가르칩니다. 육은 결국 멸망으로 끝날 뿐임을 말씀하면서 영원한 영의 문제를 바라볼 것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 육의 문제를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은 예수님께 있었던 즐거움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에게 있었던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관심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고 나를 피곤하게 하고 낙심하게 했던 것임을 알았기에 예수님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 되기를 소망하고 예수님의 참음이 나의 참음이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야말로 주안에서 새사람 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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