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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징계의 유익

본문 / 12: 9-13

 

1. 유익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죄를 범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오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에 담겨 있는 유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징계가 신자에게 유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은, 징계가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신자로 하여금 천국을 소망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 육을 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보면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12:5)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징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유익을 경히 여기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징계는 결국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며 천국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징계를 통해 주어지는 유익을 놓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편함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12:10)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주는 유익은 세상의 헛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아무리 소유한들 그것이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 징계의 유익입니다. 세상의 것이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우리의 눈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자로 변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원하시는가를 안다면 그리고 그러한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셔서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소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징계 역시 우리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징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떤 자로 달라져야 하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2. 연단 받는 자

그래서 11절에 보면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2:11)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즐거운 것이지만 징계를 받는 그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징계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후에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말에 얼마나 공감이 됩니까? 세상의 관심은 의와 평강의 열매 따위에 있지 않습니다. 의와 평강의 열매가 인생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인생에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당장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에 감춰져 있는 즐거움을 보지 못하고 슬픔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계로 말미암아 진리의 바른길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일으키시고 진리의 길을 가는 자로 만들고자 합니다. 세상은 모두가 진리가 아닌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굽은 길을 가고 있는데 이런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사 진리의 길을 가는 자로 만들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가기를 소망하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징계가 큰 유익일 수밖에 없고, 징계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의와 평강의 열매로 인해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편한 인생길을 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징계를 동원하여 세상을 향한 소망이 헛됨을 알게 하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음을 동원하여 자신의 고생을 덜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고생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을 믿음의 열매로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악함인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악함이 유익이 있는 하나님의 징계조차도 악한 것으로 밀쳐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나를 고생하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악한 것이라는 선악개념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이 우리이기에 유익이 되고, 즐거움과 감사로 맺어질 수 있는 징계를 피해야 할 것으로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피하기 위해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게 되고 결국 주일에 교회를 나오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도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결코 우리에게 우리가 꿈꾸고 기대하는 이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를 세상이 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다른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시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육을 추구하고 육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를 영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3. 고침 받음

그래서 본문 12절부터 보면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12-13)고 합니다.

여기 그러므로라는 말은 바로 앞의 단락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앞부분은 징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기에 징계가 있는 것이며, 징계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된 것들뿐임을 알게 하여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고,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4-16)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지어드리려고 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 왕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성전은 그 아들이 지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를 아들로 삼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이란 솔로몬인데 죄를 범하면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는 하시지만 사울에게서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지는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으로 인하여 은총을 거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로 대우하시는 언약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믿는 우리에게도 이런 언약적인 사랑이 주어지기에 비록 징계가 있고, 낙심과 환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는 것이 바로 언약적인 사랑의 결과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비록 죄를 범할지라도 다윗과의 언약으로 인하여 은총을 거두시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오늘날 성도인 우리는 성부와 성자의 언약으로 인하여 그 은총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는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언약 백성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경주와 같고,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이기에 낙심과 절망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는 우리 힘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에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곧은길을 만들고 저는 다리로 어그러지지 않게 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고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경주는 날마다 고침을 받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세우라는 이 말씀과 곧은길을 만들게 하는 말씀이 구약의 이사야 3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보면 구약에서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어떻게 돌아오는 지를 보게 됩니다. 그들을 향하여 약한 손을 강하게 하고 연약한 무릎을 굳게 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어떻게 선포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35장에 보면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35:3-10)고 합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이 범죄로 인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하나님의 구원을 입고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오는 길은 대로이며 거룩한 길이고 또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 길은 오직 구속함과 속량함을 받은 자들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속함을 입고 대로로 돌아오는 자의 모습이 맹인과 귀머거리 그리고 저는 자와 벙어리인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예레미야 31장에도 보면 “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31:7-9)고 합니다.

이 말씀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는 자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여기도 보면 돌아오는 자들이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까? 이들은 자기들의 힘과 능력으로 돌아오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구원의 능력을 보이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높은 산이 깎이고, 깊은 골짜기들이 메워지며 대로가 만들어져서 주의 백성들이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대로가 아니면 어떻게 맹인과 다리 저는 자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께 구속함을 입고 돌아오는 자들은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이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이 서신을 받고서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는 신앙의 여정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내용이며 주께로 돌아가는 길이 그들의 힘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셔서 대로로 가게 하신다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본문 말씀처럼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과 저는 다리이지만 여호와의 언약으로 인하여 그들이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그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지금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으로 인하여 믿음의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된 것을 다시 고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범죄 하여 이방의 나라에 사로잡혀갔을지라도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대로로 인도하여 시온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자들의 피곤하고 연약한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은 완벽하게 인도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지금의 피곤하고 연약한 모습들,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것들이 고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4. 우리 신앙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먹고 살게 하기 위해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바라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고, 세상이 추구하지 않는 영을 추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만드신 다른 세상이 있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세워진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가르키는 이정표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신자는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나 같은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징계로써 인도하시는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기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징계의 유익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쨌든 육신의 고생을 피하는 것을 제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 같은 것은 관심 밖의 일일 뿐이고 오직 육신의 편함을 누리는 것을 신앙의 제일로 삼고 살아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나 같은 자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징계하셔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사랑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기쁨을 맛보게 될 때 세상이 제공하는 기쁨이라는 것들이 결국 허무한 것이고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앙을 세상에서의 고생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만 여긴다면 사도들은 참으로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한 사람임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자신의 고생을 부끄러워했습니까? 그리고 그 고생으로 인해 예수님을 원망했습니까? 자신의 믿음에 의심을 했습니까? 바울은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큰 기쁨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징계를 고생으로만 여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큰 기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뿐,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우리의 편안함입니까? 그러나 세상이 추구하는 기쁨이 결코 기쁨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기쁨으로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쁨으로 우리에게 살아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징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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