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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활을 누리는 삶

본문 / 고전15:12-19

 

1. 거짓 믿음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서를 통해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문제들을 바울 사도는 서신을 통해 복음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결국 성도의 문제라면 복음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사하심이요, 그 살아나심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이 복음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15:12)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전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 중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지금도 대다수가 살아 있다고 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을 믿지 않을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 고백인 사도신경에도 보면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는 것을 다 외우고 있고 또 그렇게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며 살아왔습니다.

러나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과 입술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서 부활을 믿으며 사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점검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부활의 세계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게 되고 또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기에 그런 손해를 감수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상대방을 향해 축복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돈은 떨어지고, 몸은 아프고, 배는 고프고, 추운데도 부활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부활을 믿는 자들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이런 이야기 앞에 아멘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연약한 모습인 것입니다. 사소한 손해를 보는 것도 참지 못하고, 조그마한 자존심 하나 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살면서 내세를 믿는다고 또 부활의 세계를 믿는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디도서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1:16)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입술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시인은 하지만 행위로 부인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며 복종하지 아니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혹시 부활하실 정도로 전능하신 예수님이라면 왜 나의 삶에는 쨍하고 해 뜰 날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한평생 볕들 날이 없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고서 세상에서 잘 된다고 하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입니까?’하는 생각으로 부활의 주님을 부르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부활을 믿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서 내가 기대하는 부활을 믿는 자의 모습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점검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2. 부활을 믿는 자

성경에는 부활을 믿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고 합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한다면 그것보다 나은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무언가 더 나은 한 가지를 얻기 위하여 다른 것 한 가지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포기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25절부터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거절함으로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결과는 고난과 수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수모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시 죄악을 낙을 누리는 것보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란 세상 최고의 보화들입니다. 단지 금은보화만이 아닙니다. 최고의 문명이며, 최고의 기술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이 다 있는 곳이 애굽입니다. 이것을 다 버리고 고난과 수모의 길을 간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나은 상이 무엇입니까? 먼저 여기서 말하는 애굽의 모든 보화라는 표현은, 그 당시 애굽은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기에 이 세상에서는 그 애굽의 보화와 비교할 만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것은 결국 모세가 기대했던 것은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상으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상인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 하는 것을 믿음장이라고 하는 이 히브리서 11장의 마지막 부분인 35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11:35)라고 합니다. 여기 더 나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또 계속되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들은 부활을 믿었기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유리하고 궁핍하며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인다고 하여도 그 죽음을 달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믿었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믿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을 믿은 바울의 신앙 또한 방불합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4-11)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옛날에 자랑거리로 삼았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해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을 믿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해로 여긴다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영광이나 돈을 사랑함이나 세상의 쾌락 사랑함을 해로 여긴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라고 하며 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자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만큼 지킨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자랑거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배설물이요 오히려 해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이 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아는 것은,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활에 참여하고자 함을 알게 되려면 이 세상에서 죽음에 넘겨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망의 나라, 즉 이미 죽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부활의 세계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이 없고 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3. 부활 생명

이제 다시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15:12-18)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면서 만약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복음이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요,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의 권세 가운데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삯은 바로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구약에서 그렇게 더 나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핍박받고 죽어간 성도들과 신약에서 역시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순교 당하고 핍박받아 죽어간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활의 세계고 뭐고 간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한번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를 무시하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 속에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를 믿는 사람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세상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보통사람도 더럽다고 여기는 부도덕한 일들만을 더럽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가장 고상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았다고 하는 것조차 배설물과 해로 여기는 것이 부활을 믿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기대처럼 만사가 형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이고 부활과 생명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기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에서 공통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우리가 듣는 설교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고 감사하다면 그 믿음과 감사를 어떻게 나타내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헌금을 정성껏 내고, 봉사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감사하는 자에게 또 헌신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성공하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우리가 방금 본 말씀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에 아멘하고 따라가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다시 빌립보서 3장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3:17-21)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 받을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며, 저희의 신은 배입니다. 욕망이 그들의 신인 것입니다.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바라는 것이 바로 이 땅과 세상의 영광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이 원수가 바로 오늘 그런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임을 인정하십니까?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그 주가 지신 십자가와 원수로 행하는 자들임을 봅니다. 그러나 이제 주의 권면 앞에 돌이켜 진정으로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하늘의 것을 찾으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소망하여 이 땅의 모든 환란과 어려움을 감수하며 신앙을 지켰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우리 또한 그 믿음을 우리 믿음의 후배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믿음 장에 오른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매일의 삶의 부활을 누리며 기쁨으로 사는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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