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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본문 / 2: 1- 4

 

1. 성령의 오심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성령 받음과 성령 충만을 구분하면서 성령 충만의 현상을 방언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신자의 믿음은 단지 성령을 받아서 예수를 믿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성령 충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오늘 본문과 동일하게 방언과 같은 신비한 체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오심이 단순히 방언이라는 체험을 하기 위해서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신비한 체험이라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현상이고, 우리가 말하는 방언보다 더 신비한 체험들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 체험을 내세워서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려고 한다면 다른 종교들도 기독교에 비해 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는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심으로써 시작이 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교회는 단지 인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부르고 예배하는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임은 성령이 오기 전에도 있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된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을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된 교회는 예수님의 피를 중심으로 모이며 그 피의 은혜를 증거 하는 것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여기는 사람들의 모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이러한 교회가 불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와 행위와 의를 모두 부인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와 의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 앞에 자신의 공로와 의를 부인하게 하고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령 충만이 방언으로 나타나는 것이겠습니까? 이왕이면 좀 더 대단하게 보일 수 있는 거창한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에서 능력을 행하셨을 때부터 그 능력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수단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놀라운 능력을 행하셔서 예수님이 대단한 분임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모으고자 하셨다면 예수님도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놀라운 능력을 많이 행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애당초 놀라운 능력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능력을 보고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영으로 오신 성령 충만의 첫 현상이 방언이라는 것은, 방언을 단지 이상한 말을 하는 신비한 체험의 의미로 이해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2. 방언

오늘 본문에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2:6-11)라고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 즉 방언으로 말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일에 대해 전파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말이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자기 나라의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즉 언어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심으로써 언어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말의 소통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13절에 보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2:13)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새 술에 취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이 한 방언이 혀 꼬부라진 말처럼 이상하게 들려서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으로 여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었던 9절부터 보면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2:9-11)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방언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라의 말로 들으면서 하나님의 큰일에 대해 증거 하는 것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자들의 방언이 술 취한 사람의 혀 꼬부라진 말로 들렸다면 위와 같은 반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것은 제자들의 말이 세상의 통념에는 맞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말이 달라서 소통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달라서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자기들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그들이 같은 나라 백성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충만함으로 드러난 것은 천국에 속한 백성과 세상에 속한 백성으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천국에 속한 백성이 나라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속한 백성들은 천국에 속한 자의 뜻과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말 또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오심은 성령 안에서의 통일과 구별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3. 오신 목적

에베소서 4장에 보면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4-6)고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된 참된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고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가능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배당을 마련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있고,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면 교회가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관계만을 교회로 인정하실 뿐입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때문에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를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개혁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의 마음에 드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며,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는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여전히 우리에게 일하심을 체험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모이는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신자를 이런 같은 마음이 되게 하고 모이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참된 몸을 세워 가십니다.

교회에 이런저런 사건이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죄가 드러나게 하고 그 죄를 통해서 누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만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신자인가를 드러내십니다. 신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뜻 아래 모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인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교회가 될 수 있다면 성령은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맡겨 놓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의 착각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교회에 맡기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맡기신 일이 바로 소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세력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교회에 맡긴 예수님의 일이고, 이 일을 위해 교회는 선교에 힘씀으로써 전 세계의 복음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신 것은 이 일을 도우시고 힘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하는 새로운 사람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면서 새로운 예수님의 나라를 세상에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몇 명이 모이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를 떠나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이미 교회 된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곧 성령이 역사한 것이고 예수님이 함께 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것으로 이미 충만한 상태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충만한 상태를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교회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전도도 해야 하고 헌금도 해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오심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것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성령을 통하여 자기 백성, 즉 하나님의 아들이 있게 하고, 그 아들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받은 신자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모이면 됩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예수님의 의를 증거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런 신앙고백을 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0-21)고 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신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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