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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자의 열매

본문 / 13: 9-15

 

1. 신자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강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의지의 결과가 아닙니다. 강제가 아니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동참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본래의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된 자로서 예수님이 가신 길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며 영원이심을 알았기에 예수님이 가신 길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길로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등산로처럼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올라가도 결국 정상에서 모두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각기 가는 길은 달라도 추구하는 것은 같으며 결국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말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되심과 십자가에 피 흘리심과 은혜를 철저하게 짓밟는 사단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만이 생명에 소속된 자로서 영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떠나 살 수 없는 자이며,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소망을 두지도 않을 자이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외에 다른 것을 힘으로 삼지 않을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교훈은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있으며, 그 교훈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악한 심령을 다스리고 고치면서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고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삶으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교훈이 그리스도를 빙자하여 세상의 것을 약속하거나, 신앙을 언급하며 인간의 열심을 북돋우어 십자가의 피의 공로가 아닌 인간의 열심을 공로로 내세우고 그 공로에 대한 대가를 하나님이 지불 하시는 것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교훈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세상에는 진리로 위장한 거짓된 교훈들이 난무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진리만을 고집하고 진리만을 소망하는 자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굳게 세워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다른 교훈에 끌림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13:9)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빙자한 여러 다른 교훈이 있다는 것이고 또 그런 교훈에 사람들의 마음이 끌리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른 교훈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굳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다는 것은, 식물을 먹고 또는 먹지 않는 것으로 신앙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실천을 신앙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의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실천함으로써 그런 자신이 의롭다 여김을 받고 복을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으로 인한 본성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다른 교훈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은혜에 붙들려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것으로 마음이 채워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행함이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경험이나 체험들에게 마음이 끌리지를 않게 됩니다. 그 어떤 경험과 체험도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어떤 경우에도 은혜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누가 어느 기도원에 가서 안수받았더니 병이 나았더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병이 낫고 싶은 욕구로 인한 자연적인 움직임인 것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병이 낫고 싶은 욕구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불치의 병이 무슨 방법으로 나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병 나은 것이 믿음의 증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된 놀라운 기적에 머물러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기적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죄에서 구원된 기적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적이 기적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 아닌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기적이 아닌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믿는다는 것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믿음이 그런 것이라면 성령이 왜 오셔야만 하는 것이겠습니까? 또 왜 우리를 새롭게 하셔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성령으로 새롭게 하신다는 것은, 옛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이기에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은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전혀 신기한 일도 아니고 기적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착함도 의로움도 모두 부정하고 오직 자신을 사망에 처한 자로만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감사함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피 외의 모든 것은 다른 교훈으로 말하며 오직 은혜로써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기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3. 영문 밖에서 불사름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13:10-11)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단에 드려진 제물을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 말씀은 레위기 6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레위기 6장에 보면 “2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26.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27. 그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28.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29. 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을지니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30.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하게 한 속죄제 제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6:24-30)고 합니다.

레위기 6장의 이 내용은 속죄제를 드릴 때 제사장이 주의해야 할 사항에 관한 것입니다. 속죄제는 죄를 범하여 죄를 씻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장은 일반 백성이 드린 속죄 제물 중 불살라 바친 내장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고기를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16.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17. 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10:16-17)고 합니다.

모세가 백성들이 속죄제로 드린 염소를 찾는데, 이미 불살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모세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하는데 왜 먹지 않았으냐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속죄 제물의 고기를 먹어야 하는 것은 제사장이 여호와 앞에서 중재자의 자격으로 이스라엘 회중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은 제단에 피를 뿌려 속죄할 뿐만 아니라, 희생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 행위를 통하여 백성의 속죄 사역에 상징적으로 동참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처럼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는 것은 신약시대의 성만찬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즉 성도들이 주의 몸인 떡을 먹음으로 예수와 하나되어 그분의 고난과 이스라엘 회중의 대속 사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27절에 보면 하나님은 속죄 제물로 드려진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다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구약의 모든 제물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렇기에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께 손을 댄 자들이나 예수님이 손을 댄 자들이 거룩함을 입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원래 죄인인 인간이 거룩함에 접촉이 되면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위하여 속죄 제물로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은, 그와 접촉한 자들은 거룩함을 입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속죄 제물이라고 해도 레위기 6장 마지막 절에 보면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하게 한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6:30)고 말합니다.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씻기 위해 속죄제를 드립니다. 그때 바쳐진 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영문 밖에서 불사르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속죄 제물의 완전한 희생으로 주어진 은총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영문 안의 세계와 영문 밖의 세계가 제물의 희생으로 구별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찬미의 제사

그래서 13절부터 보면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13:13-14)라고 합니다. 영문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보암직하게 살아야 성공이며 축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씀은 우리의 삶의 형태 전체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로 부름받은 자는 영문 밖으로 나가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영문 밖으로 나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영문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있는 성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왜 영문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문화가 어떻게 번성하였나 하는 것은 창세기 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인과 그 후손들의 모습은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악기를 만든 것입니다. 한마디로 도시문화의 발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모습은 나그네로 살았던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그 성읍이 영구한 성읍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도성을 버린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유대주의라는 안전한 도성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약의 규례로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자기 의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 지식과 과학의 힘으로 세우고자 하는 안전지대 또는 종교성으로 만든 안전지대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자기들의 힘으로 이루고자 하는 성읍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11:8)고 합니다. 하나님의 두 증인이 죽임당하는 성이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며 애굽이며 또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예루살렘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배척하는 모든 곳이 다 소돔이며 애굽이며 예루살렘이 되는 곳입니다.

이런 성읍에 대하여 계시록 18장에 보면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18:1-4)고 합니다.

큰 성 바벨론이 성읍입니다. 이 성에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나오라고 합니다. 이 바벨론은 세상의 힘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이 바벨론의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바벨론이 무너질 때 통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성읍에서 믿음 때문에 핍박당한 자들은 그 성읍이 무너짐을 인하여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 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18:20)고 합니다. 이 바벨론은 큰 맷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처럼 다시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 성읍에서 살고 있습니까?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성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성읍이 영원한 것처럼 살자고 합니다. 그 성읍 한가운데로 더욱더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구한 성읍이 아닙니다.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구한 도성을 바라고 찾는 자들입니다. 그 영구한 도성이란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영문 밖의 세계는 제물의 완전한 희생을 믿는 믿음의 세계인 반면에 영문 안의 세계는 제물의 완전한 희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의식과 인간의 행함을 바라보는 인간이 중심인 세계라는 것입니다. 병 고침도 율법도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보태어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다른 교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인간의 행함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순전하게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감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실천도 해야 하고 성령을 받아서 병도 고쳐야 하고 기도해서 응답도 받아야 그것이 진짜 믿음이고 은혜 아래 있는 증거라고 가르치는 모든 것이 다른 교훈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참으로 깔끔하며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기독교는 인간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믿음 자체만으로는 불안해하며 보이는 것을 동원하여 믿음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되는 십자가 사건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보다 병이 나은 체험에 더 믿음이 가고, 응답 받은 체험을 더 확실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의 결단과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3:15)는 말을 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찬미의 제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내신 긍휼과 사랑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갈 뿐임을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찬미의 제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신자의 입술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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