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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본문 / 13:20-25

 

1. 오직 예수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나누면서 우리가 함께 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한 적이 없고, 소위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덕목에 대해서 말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계속 들어왔기에 지루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매주 그리스도만을 이야기하지만 전혀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기 전 항상 먼저 다가오는 것이 내 안의 탐욕과 엉뚱한 관심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늘 새로운 분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이야기 가운데서도 항상 새로운 분으로 우리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살펴오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악한 우리를 용서하며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새롭고 놀라운 은혜 말입니다.

이 은혜는 구약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붙들어 인도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믿음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온 것이었음을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말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믿음의 여부에 관심을 두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내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다스리고 고치면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시작인 1장에 보면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1-2)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히브리서의 시작이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선지자를 세워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다시 말해 여러 가지 기적과 사건으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생각과 마음이 그리스도께 있을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채 말씀하시는데 말씀을 듣는 우리의 마음과 관심이 그리스도가 아닌 나를 향한 채 말씀을 듣는다면 결국 말씀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래서 내 자신에게 관심을 둔 채 예수님을 찾는다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돕는다고 하는 다른 예수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우리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이러한 착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2. 아멘

늘 본문 20절부터도 보면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3:20-21)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의 이 마지막 부분은 송영입니다. 송영이란 예배의 시작과 마지막에 들어가는 기도 형식의 송가입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의 뜻이 함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0절부터 보면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13:20-21)라고 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사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온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의지를 동원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라고 하고 아멘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마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6:13)이라는 내용과 흡사합니다. 예전 주기도문을 보면 이 부분 앞에 대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왜 성경에 없는 대개라는 말을 넣었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개라는 말은 부사로 쓰이면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는 뜻입니다. 문장을 자연스럽게 연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이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런 말이 됩니다.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는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는 송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는 마지막 부분의 말씀은 송영, 즉 찬송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모든 기도는 그 끝에 이 송영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어떻게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들도 유대인이었기에 제자들 또한 송영 없이 기도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한 예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7-18)이라고 합니다. 여기 마지막 부분의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하는 이 부분이 송영입니다. 그리고 역시 아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송영 부분을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청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심으로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양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아멘은 송영의 마무리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잔뜩 구하여 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예수님의 이름과 아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멘하면 다 이루어주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하면 응답이 없는데 우리가 구하는 것이 정욕이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기도한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 이미 내가 중심이 되어있기에 탐심과 정욕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뜻과 정신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은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아멘이란 믿음, 진리, 확신, 신뢰 등을 가르치는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청원과 기도이기도 하지만 찬송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서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명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을 지어다고 하면 아멘으로 화답하고, 불순종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고 하면 역시 아멘으로 화답을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의 선포에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아멘이 아예 예수님의 별명이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3:14)라고 하여 예수님이 아멘이시라고 합니다. 아멘이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라는 말과 연결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과 연결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모든 언약을 다 완성하실 신실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송영 부분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분에서 항상 아멘이 나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고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아멘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천지를 자기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내셨다는 이 말씀에 우리가 아멘하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언약에는 항상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3. 큰 목자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양들의 큰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예수님이 큰 목자고, 목사는 작은 목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양을 인도할 크신 목자이지 예수님 외에 다른 목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17절에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3:17)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도하는 자란 목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씀으로 다른 자들을 인도하고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것이 나의 의지와 열심으로 이루는 일이 아니라 큰 목자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끌림 받는 신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님의 종도아니고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힘을 쓰고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으로 인해 근심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을 두시고 행하고 계신 결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행함으로 인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에 내가 저 사람을 전도해서 믿게 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에게 뜻을 두고 행하시는 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처럼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구원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의한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구원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즐거움을 자기 백성들 속에 이루심으로써 그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또 그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높이고 찬양하는 전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 일하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심으로 모두 이루셨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행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건설하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정말 잘 만들었다’ ‘정말 좋다라고 하면 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길에 서서 빛으로 생명의 길로 오신 그리스도를 감사하고 높이는 것이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4. 신자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23절부터 보면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13:23-25)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형제 디모데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만나고 싶은 심정을 말하는 것은, 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짐으로 선한 일이 온전케 되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행하는 것이고 선한 일이 온전케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모이고 만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만남에 그리스도가 없고 진리가 없다면 그냥 사람의 만남이고 친목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에 그리스도가 있고 또 그 은혜를 나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한 뜻을 이루시는 일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되고 생명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행하게 하고 말하게 하면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뜻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믿음에 의해 자신의 뜻이 무너지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의의 세계로 부르신 것은 예수님으로 주어진 복을 세상에 증거하고자 하시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게 되고 신자들이 출현하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새로운 소유물을 생산한 결과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의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사는 이유이고 존재의 목적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바르게 안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그 뜻에 그대로 행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와 그 누림이 오늘도 주의 말씀 앞에 선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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