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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으로 에녹은

본문 / 11: 5- 6

 

1. 두 믿음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 믿음을 안다고 여기고 있고 또 믿음이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연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고 소리치고 또 믿음으로 산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결국 헛된 삶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2-23)고 합니다.

이 말씀만 보아도 우리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많은 주의 일을 했다고 자부할지라도 주께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선언을 들을 사람도 있음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앞세우고, 믿음을 앞세운다 할찌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의 그 믿음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항상 점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믿음의 인물들을 내세워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우리 자신을 점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벨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아벨을 통해 나타난 믿음은 구별이었습니다. 첫 새끼와 기름으로 제물을 드린 것이 아벨의 믿음이었습니다. 벨의 제물에는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며, 자신의 소유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다만 바치는 행위에 중요성을 둔 수준입니다. 즉 바치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수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외면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산다면 내게 있는 좋은 것을 바치면 복 주실 것이다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여호와이시기에 여호와께 바칠 만한 내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2. 역할

오늘은 두 번째 인물로 에녹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5-6)고 말합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운 사람입니다. 앞에 있는 아벨과의 차이라면 에녹은 믿음으로 인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간 사람인데, 아벨은 믿음으로 인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느 쪽을 더 선호하겠습니까? 분명 죽은 아벨보다는 죽지 않은 에녹일 것입니다. 죽지 않고 하늘로 갔다는 것이 더 믿음이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벨과 에녹을 두고 누구의 믿음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벨은 죽었지만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도 않은 채 하늘로 옮겨졌으니 에녹이 더 귀한 대접을 받은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에녹이 아벨보다 더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대접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에녹이 아벨보다 더 큰 복을 받은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에 대하여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 이러한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더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세상에서의 환경과 소유에서 찾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환경과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복 받은 것으로 여기고, 그가 믿음이 좋기에 하나님이 그러한 복을 주셨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과 에녹의 차이는 믿음이 아니라 역할이었습니다. 역할을 두고 누구의 역할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연극이나 드라마에도 많은 사람이 등장하면서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결코 동일한 역할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 연기함으로써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물론 주인공의 역할이 가장 비중이 크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주인공만으로는 드라마를 완성할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모든 역할은 한 드라마에 있어서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믿음을 이해한다면 아벨은 죽음으로써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간 것으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에녹이 아벨보다 더 낫은 믿음이라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위를 보면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힘들게 고생을 하는 분이 있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일찍 죽은 분도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은 불행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다만 그런 역할을 맡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신자는 각기 역할을 맡아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라면 남의 역할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못사는데 저 사람은 잘사는 것으로 불평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고 말합니다. 에녹이 하늘로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하는데,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곧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에녹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3. 에녹의 믿음

창세기 5장에 보면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21-24)고 합니다.

에녹이 육십오 세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씀이 없는데,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고서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녹이 육십 오세 때에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게 자녀를 낳고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것입니다. 여전히 아이 낳고, 기르고, 농사짓고, 물건을 사고팔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겨졌다고 해서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겨질까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동행하는 것이 바른 동행인가를 연구한다면 그것은 또다시 자신의 구원 욕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과 동행하여서 구원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나타나셔서 계시를 주시고 동행하여 주심으로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유다서 1장에 보면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1:14-15)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에녹이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내용은 심판의 내용입니다. 에녹이 그 당시에 예언자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를 증거 한 것입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는 낳고서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 심판의 메시지가 므두셀라에게 있다고 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자녀를 낳을 때에 그 이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에녹은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두 단어로 구성되었습니다. 무트는 심판과 죽음을 의미하며, 살라트는 보낸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므두셀라를 보내면 이 세상에 심판이 있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찾으면 명사는 창을 던지는 사람’, ‘던지는 무기이고, 동사로서 기본어근으로 보내 버리다’, ‘보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럼 먼저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 중 창을 던지는 자란 의미를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날의 전쟁은 먼저 적군과 아군이 마주 서서 항오를 벌리고 두 편에서 대표자를 내보내어 서로 싸우게 하는데 자기들의 대표가 이기면 사기충천해서 그날의 전쟁은 대표자가 이기는 쪽 군대가 그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 이스라엘 군대가 불레셋 군대를 이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창을 던지는 자는 대표자로서 이 자가 이기면 자신의 군대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창 던지는 자가 죽으면 세상이 끝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 던지는 자인 므두셀라가 죽으면 세상도 끝난다는 말입니다.

또한 보내 버리다라는 뜻도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무엇을 보내 버린다는 말입니까? 에녹이 하나님께 홍수 심판의 계시를 받고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지은 것은, 세상에서 이 아들을 떠나보내면(죽으면) 세상에 큰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로 지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의미의 이름인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부르고 듣는 것만으로 종말에 관한 메시지를 듣고 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내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 세대를 보내고 새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또 이 므두셀라의 나이를 계산하여 보면 노아 홍수의 때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는 369세입니다. 홍수 심판은 언제입니까? 노아 600세 되던 해이기에 더하면 므두셀라 969, 즉 죽은 그 해가 노아 홍수가 일어나는 해입니다.

그래서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 므두셀라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내용을 믿고서 늘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자다가도, 주님이 임하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므두셀라가 잠시만 보이지 않아도, 므두셀라의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주님이 임하실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 하였을 때 사람들은 에녹을 어떻게 여겼겠습니까? 아마도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멀쩡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여 경건치 아니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누가 믿었겠습니까? 마치 노아 홍수 때와 같이 사고팔고,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전부인 양 살았을 것입니다. 에녹도 똑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았지만 무엇이 달랐습니까?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모습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은 틀림없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가족에게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된 것이며, 이러한 믿음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입니다.

 

4.

다시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고 합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산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목표고 하고 살 때에도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러한 삶이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의 노력으로 이런 삶을 살아 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삶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신이 존재한다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존재하니까 내가 신에게 무언가를 대접하여 받아내겠다는 거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란 귀신도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입니까? 에녹의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만물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동행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신을 모셔두고 정기적으로 예물을 바치면서 나의 삶을 윤택하고 안전하게 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신으로 두고서 다른 존재들을 자기를 위하여 세워두고 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의 이름이라고 하여도 자신이 복종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거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나 예물이 아닌 것입니다.

미가서 6장에 보면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6-8)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 보면 우리가 평소에 이런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리라고 생각한 것을 도리어 거부하십니다. 수많은 제물, 내 맏아들, 내 삶의 열매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여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즉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 드는지 우리는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살기에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함께 사는 것이 그렇게 부담되고 귀찮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구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상을 주신답니다. 이 상은 세상에서 사라질 것들이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상이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상입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기에, 세상 사람들이 밉다고 배척하여 버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상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상급입니다.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는 틀림없이 미움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부르심을 입은 증거이기도 합니다. 모두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좋다고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현장에서 이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하고 곧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불살라 없어질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런 자를 좋아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믿고 사는 사람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동행을 하지 않기에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동행하시면서 우리가 항상 다른 길로만 가려고 하면 우리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여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건마다 또 일마다 주님이 동행하여 주시는 삶을 맛보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동행이란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약속의 세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외면하고 어떤 행위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의 믿음 또 에녹의 믿음을 보면서 나의 믿음은 과연 어떤가를 살펴야만 합니다.

믿음은 나 자신을 보지 않게 합니다. 어떤 형편에 살든 그것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역할로 믿으며 오직 믿음으로 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믿음에 있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하시고 믿음의 참된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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