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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본문 / 4: 1- 3

 

1. 믿음

믿음은 말이 아니고 생각도 아니며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섣불리 속단하는 것을 주의해야만 합니다. 즉 교회와 연관된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나는 주님을 믿는다는 결론을 쉽게 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믿음의 여부를 확인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즉 내가 주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로 들어가기 위해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주를 믿는다는 생각에 멈추어 버리면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다만 나는 잘 믿고 있는데 굳이 나를 돌아보고 점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믿음의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이제 남은 것은 세상 문제에 신경 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엇을 가지고 나는 주를 믿는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교회 출석입니까? 아니면 주일성수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성경보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인간의 종교적 활동과 행위를 가지고 믿음으로 인정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면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에는 받아들임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골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회피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를 믿는다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나는 과연 주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할 것입니다.

신자가 두려워할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 자로서 예수님을 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예수님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버젓이 예수님을 말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받아들임의 문제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믿음의 화합

오늘 본문을 보면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4:1-2)고 합니다.

여기 보면 말씀을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는, 즉 믿음의 화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들은 말씀과 믿음을 연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결론은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두려워하며 삽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주로 하늘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땅의 문제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문제들이 모두 땅에 속한 것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하늘에 속한 믿음의 문제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없이, 고민도 없이 산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신자가 두려워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믿는자라 하며 또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에 화합한 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 복음은 복음이고 나는 나라는 식으로 살아가면서도 그러한 자신의 문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신자는 두려워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있는 심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1절에서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이라는 약속을 받은 자로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 때문이 아닙니다. 원망과 불평이 원인이라면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그들을 멸망시켰어야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 속에서도 원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물론 책망도 하셨고 징계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정탐꾼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신명기 1장에 보면 “34.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35.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1:34-36)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땅에 입국하기 전에 모세는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가나안 거민은 용사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포기합니다. 들어가면 우리는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모세는 “29.~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1:29-31) 는 말을 합니다.

세는 이스라엘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근거로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말을 믿지 않았고 그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나오게 하실 때 그들을 바로 몰래 빠져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를 치시는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목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강함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바로보다 강하신 분임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무엇에도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안다면 어떠한 것에도 두려움이 없는 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화합이며, 믿음과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강하심을 체험했고, 홍해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했고, 광야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했으면서도 가나안 거민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자 되어진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피 흘리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면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면 우리는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체험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놀라운 사랑을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내용을 포함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에서 확인하겠습니까? 소위 세상의 복으로부터 확인하겠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사건으로 확증 되어진 그 사랑을 믿으며 살겠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 십자가를 말하고 긍휼과 사랑을 말하면서도 정작 세상의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복과 은혜를 확인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믿음에 화합한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진노하심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자신이 믿음의 내용에 합당한 길을 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이삭을 바라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순종하여 본토 아비 집을 떠났지만 그리고 그것도 우리의 시각에서는 대단한 믿음이겠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들에게 아이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반응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농담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까지 행합니다. 자칫 아비멜렉의 아내가 될 뻔했던 그 위기의 순간에서 사라를 하나님께서 구출하셨습니다. 이 역시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잘못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브라함에게 보이시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는 믿음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에 있었던 실패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바친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이루실 것임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자라간다는 것은 믿음의 양이 커진다거나 질이 달라진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욱 깊이 알아가고, 그 하나님이 내 마음을 점령하여 지배하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삶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4:3)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믿는 자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합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있는 것처럼 지금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기 3절 하반절의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는 말씀은 시편 95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959절부터 보면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95:9-11)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에서의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다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시는 일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안식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를 정하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백성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이어야 함을 믿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 자명한 것입니다. 이미 안식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를 정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믿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약속의 세계를 오늘도 눈에 보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며 또 이미 안식을 맛보면서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자신을 보고 주위를 보아도 정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마음속을 우리는 볼 수가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영원한 안식,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3-16)고 합니다.

이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자기들이 떠나온 고향을 찾으려고 하였다면 얼마든지 찾아갔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 땅에는 영원한 본향이 없기에 더 나은 본향을,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런데 지금 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이 세상을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잠시 있다가 가는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자들에게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것입니다. 이 약속 하나만을 우리에게 남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족과의 아픔도, 이웃과의 아픔도, 경제적인 고통도, 신체적인 고통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자의 흔들림은 지금 이 일로 인해서 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지금까지 나를 안으사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었으며 또 우리들인 것입니다. 두려움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은 풍요로움과 편안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지나온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으사 지금 그 자리까지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믿음이 신자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어려움과 힘든 것 때문에 원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십자가 사건으로 확증된 사랑을 팽개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껏 나타내시고 보여주신 모든 것을 거짓된 것으로 멸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두려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말하면서 과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피기 바랍니다. 나는 항상 믿음을 버릴 수 있는 자임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주님께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행여 내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까 두려워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두고자 힘써 산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따르는 주의 백성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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