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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

본문 / 5: 7-10

 

1. 은혜를 누리는 것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은 우리들의 처지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가실 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대표하기 위해 죄인의 자리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낮아지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낮아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고,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몫인 사망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가볍게 여겨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는 기본이라고만 여기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만큼 은혜에만 머물지 말고 이제는 더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신자가 은혜에만 머물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기서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뭔가 열심히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있을 때 그 은혜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섬김과 겸손 그리고 희생과 온유 같은 이 모든 것들은 은혜 안에 있을 때 맺어지는 것들이지 우리의 열심과 의지로서 맺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은혜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에서는 주안에 거하는 것 또는 주안에서의 삶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고 자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머물고 있다고도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에 머물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하고 점검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자신이 죄인 됨을 아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는 자기 문제를 바로 직시하고, 자신의 죄의 상태를 깊이 깨달은 신자들에게만 부각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자신이 죄인 됨을 안다면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력 또한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돕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일

그러면 죄인된 우리의 대표자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 어떻게 일을 하신 것입니까?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5:7)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에 계심으로 사람의 연약함을 다 체험하신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연약하여지심으로 인간의 연약을 다 알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앞 2절에서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5:2)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 대제사장이 완벽하다면 다른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대제사장인 자신들도 연약하기에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먼저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연약함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인간 대제사장인 그들도 모두를 용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직분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죄를 가리워 버린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마치 완벽한 자처럼 여기며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과 같이 살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정죄하고 돌을 들어 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한 육체로 계셨기에 인간의 모든 연약을 다 체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를 용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2장에도 보면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고 합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기에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모든 시험을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고 합니다. 육체로 계셨기 때문에 우리의 받는 시험과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참 대제사장이 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이 눈물은 누구를 위한 눈물이고 또 누구를 간구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일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구원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예수님의 구원을 인간인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수준 낮은 것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 됨을 알아야만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그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귀한 것이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우리가 은혜로 받은 구원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경건하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경건이라는 뜻은 어떤 것을 소중히 받들고자 하는 데가 있어 엄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받드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경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 성경인 개역성경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5:7 / 개역성경)고 하여 이 부분을 경외하심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나서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창세기 2212절에 보면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아니하고 바침으로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삭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7-19)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슨 믿음입니까?

창세기 21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21:12)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삭이 아닌 아브라함에게 나는 자가 아브라함의 씨라면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고, 다른 자식도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삭에게서 나는 자만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케 되는 약속의 성취에 이삭은 절대로 빠질 수가 없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되기에 이삭에게서 아들이 있기 전까지 이삭은 죽을 수 없는 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슨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는 행위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침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기에 그런 아브라함을 통해 드러난 경외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제공하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신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래서 오늘 본문 8절부터 보면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5:8-10)고 합니다. 여기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며 그 순종의 과정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도 고난받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본질이 불완전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온전케 되셨음을 뜻하는 것으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통해 구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그의 백성의 대제사장으로 완전하다는 인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즉 고난을 받으실 이유가 없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근원은 예수님뿐이며 때문에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곧 순종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 보면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9-10)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고난이 구원받을 자의 대신 죽음을 맛보신 것이며, 고난으로 온전케 하신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5장에도 보면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7-19)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고난의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그 죽으심의 자리까지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었고 또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만을 높여왔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신 것입니다.

리의 구원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순종으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분의 변함없는 대제사장의 역할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대신 전하여 달라고 요청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과 구원의 근원이 되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 때에는 그들이 모세를 거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할 수 없도록 그 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버렸습니다.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도록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순종하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몰아 넣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12:18-29)고 말씀합니다.

모세 때에는 땅만 진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도 진동하여 버리실 것입니다. 전에는 시내산에서 경고한 모세였지만 이제는 하늘로서 경고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두렵고 놀라운 사실, 천지를 진동하며 소멸하는 불이신 그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가겠습니까? 우리의 몸을 바치면 되고, 우리의 아들을 바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새 언약의 중보시며,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요 대제사장으로서 입니까? 아니면 나의 세상적인 필요와 만족을 위한 것입니까? 시내산의 두려움보다 더 놀라운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과연 무엇입니까? 이 구원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전부를 걸어놓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228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욱 알고 누려야만 합니다. 그 받은 은혜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즉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입니다.

 

3. 신자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미 다 아는 내용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다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항상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근원이시지만 그리고 예수님으로 구원이 완성되었지만 그래도 우리 자신에게 어떤 신앙의 행동이 있어야지만 자기 구원이 완벽해진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행위를 기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데도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라는 의심을 갖는다고 하면, 이 사람은 자신의 구원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근원이시라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착함이나 의로움을 보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가 예수님의 은혜를 폐하거나 누리는 조건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순종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이러한 신앙에 머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악함을 보면서도 구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처럼 악한 자를 구원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러면 히브리서 저자는 왜 어려움에 있는 당시의 신자들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순종의 결과로 주어진 것임을 말함으로써, 지금 어려움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어려움이 애매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즉 신자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순종이 구원을 이룬 것처럼 신자가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순종할 때, 즉 우리의 구원의 근원은 예수님뿐이며 때문에 예수님만을 의지하게 될 때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가 있을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배우는 자입니다. 고난을 배우고 순종을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럴 때 신자가 만나는 그 어떤 일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믿음으로 굳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다움임을 알아 매일의 삶 가운데서 오직 주님께 붙들린바 된 그것을 붙들기 위하여 달려가는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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