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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본문 / 5:11-14

 

1. 관심사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내 개인의 보호와 연계하여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도구가 아닙니다. 만약 신앙을 삶의 문제 해결과 연계하여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혼란과 무너짐을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신앙에서 필요한 예수님은 다만 자신의 문제를 잘 풀어주는 존재일 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그냥 예수가 아니라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실 분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보내시면 될 일을 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분으로 보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분이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예수님이시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데제사장직은 삶의 문제의 해결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을 대표로 하여 제사를 드릴 때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죄의 문제였고 또 거룩의 문제였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삶에만 치우쳐 있는 신앙이라면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분명 그에게 큰 은혜와 관심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문제보다 더 큰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영혼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연수대로 끝나는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원의 문제가 중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필요한 오직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기에, 그 믿음만이 나를 살리고 또 영원한 세계로 이끌어 가기에 믿음에 대한 관심을 우리는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관심에 머물러 있습니까?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보다, 돈을 버는 것보다, 아이들 키우며 살아가는 문제보다 더 크고 중대한 관심거리로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과연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어린신앙

예수님을 말하되 관심은 세상에 머물러 있는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 신앙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5:11)고 말합니다.

멜기세덱에 관해 듣는 것이 둔하므로 어렵다는 것은 멜기세덱에 관한 말이 어렵다거나, 듣는 자가 지식이 없어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둔하다는 것은 생각과 사고방식이 세상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고 볼 수 있는 일상사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하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세상에 있는 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란 멜기세덱의 무슨 신상 문제가 아니라 창세기에 있었던 이야기를 뜻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덱을 만난 그 일을 둔한 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면 멜기세덱을 이해하면 말씀의 초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14:17-24)고 말씀합니다.

소돔 지역의 왕들이 그돌라오멜 왕에게 12년간 지배를 받다가 13년에 반역을 하자, 14년에 그돌라오멜 왕을 중심으로 한 4개국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소돔과 고모라성의 재물과 사람들을 약탈하여 간 것을 아브라함이 듣고서 자기들의 사병을 끌고 추격합니다. 한 개인이 4개국 연합군을 대파하고 사로잡힌 사람들과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는 중에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의 축복이 방금 읽은 말씀인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브람에게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대적을 이긴 것이 아브람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대적을 아브라함의 손에 붙여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 중에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여기서 최초의 십일조가 나오는데, 십일조를 드림은 자신의 승리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여 주신 결과물임을 알기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소돔 왕이 사람만 넘겨주고 재물을 가지라고 하자 아브람이 거절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의 도움으로 치부하였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람의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 자람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르신 분의 능력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복을 빌어준 이 멜기세덱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오늘 말씀에서 말씀의 초보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에 대하여 창세기에서 보면 아브람이 먼저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나타나 아브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아브람이 원하여 나타난 제사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로 하여금 믿는 자의 조상의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아브람이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일방적으로 축복을 하는 이런 방식의 제사장을 통하여 만들어 내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 성경이 그 이후로 계속 침묵을 합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고 율법에 의하여 제사 제도를 수립하고 제사장 제도를 말하는 그 수많은 제사제도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멜기세덱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가 다윗의 시편에서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에 보면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11:1-7)라고 합니다.

이 시편은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22:43-44)라고 예수님께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였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인용하신 시편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이 제사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바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중간에 있는 율법과 레위지파 계열의 제사장이 아닌 다른 영원한 제사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그 기능상으로는 영원한 제사장의 그림자가 될 수는 있으나 그 실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선언은 이러한 뜻까지 다 포괄하는 선포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서 나타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은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영원하며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요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흔들리고 항상 유혹을 받지만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장, 즉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속죄 제물이 되시고 또 대제사장이 되시어서 하나님께의 계획과 뜻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구원에 대해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무런 공로도 되지 못하고, 복의 근거도 될 수 없음을 말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는 다만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할 뿐임을 말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는 반문합니다.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이 말이 곧 자신은 뭔가 할 수 있는 자임을 의지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두려는 것임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두고 어린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6:28-29)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만 하면 능히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함으로서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을 믿으려고만 합니다.

믿음이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이나 능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우리가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감사하며 그 은혜를 노래하며 사는 것이 신자다움인 것입니다.

 

3. 자람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5:12)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지가 오래되어서 이제는 남을 가르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 자신을 생각하며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왜 자라가야 하는지 그리고 자란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11-16)고 하십니다.

이것이 자람입니다. 자라야 하는 이유는 어린아이처럼 유혹에 밀려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과자만 주어도 부모를 버리고 과자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씀의 초보에 있다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받는 처음 독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대하여 유혹을 받아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온전하고 완전한지를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면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2:16-19)고 합니다.

머리로부터 온몸이 도움을 입어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면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고 아직도 그림자를 붙들고 있다면 그것이 어린아이요 자라지 못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무언가 잘하게 되면 장성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장성함이란 장성 할수록 주님께 메이는 삶입니다. 아예 동거하는 것입니다. 머리 되신 주님을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을 장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붙어있어야 자라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더욱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장성한 것이 독립이지만 성경에서의 장성이란 더욱 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랜 세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설교를 듣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을 가르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성경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성경을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지만 성경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저 또한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설교를 통해 성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지 성경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을 가르칠만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을 뜻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가르치면 되는데 아직 말씀의 초보조차 모르는 수준이어서 되레 남에게 말씀의 초보부터 배워야 할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단한 식물이란 앞에서 말씀하는 멜기세덱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못 먹을 자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자리에서 탈출하려고 할 뿐,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대하여서는 보지를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의인이라는 것만 고집하면서 죄인이라는 말 자체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점차 희미해지는 분일 뿐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 자들은 자신이 높임 받기를 원하고, 칭찬받으며, 가능성을 인정해주고,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듣고자 할 뿐입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복을 누리며, 구원에 전혀 지장이 없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린 신앙이며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4. 말씀을 경험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5:13)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라는 말씀의 내용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전부를 쪼개며 드러내며 내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하십니다. 즉 나의 모든 것, 숨겨져 있는 모든 실체가 말씀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자신의 악함과 죄가 모두 드러나고 결국 나 같은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주님의 은혜만 바라고 사모할 뿐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말씀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행함을 고집하며 행함에 중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은혜의 결과이며, 믿음의 열매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을 경험했기에 이런 신앙과 고백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이 주어지며, 복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과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그 믿음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있게 합니까?’라는 반문과 의문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린 신앙의 수준인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초보적인 신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러한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5:14)고 말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신앙은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에서 주님을 보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것이 자신의 그 어떤 행위나 또는 신앙의 좋고 나쁨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의 근거를 예수님에게만 둔다면 어떤 삶에서든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말씀의 초보에 머물지 마십시오. 말씀을 경험한 자로서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앙에서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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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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