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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자의 마땅한 사역

본문 / 6: 4- 6

 

1. 선택

우리가 성경에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을 보게 되는데 오늘 본문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내용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된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타락을 한다면 두 번 다시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러한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앞에서 말한 이해를 옹호할 만한 내용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선택에 의한 구원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처음부터 선택에 의해 인간이 구분되는 말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것은 오로지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선택하셨다는데 여기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선택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공로가 철저하게 묵살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도 자랑하고 내세울 만한 것이 있는데 그러한 기회를 선택 사상이 박탈해 버리게 되니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선택의 의미입니다.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묵살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인 것입니다.

애당초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은 선택이기에 인간이 잘한다 또는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잘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한다고 해서 선택을 취소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선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고 또한 구원의 취소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 본문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2. 저자의 마음

늘 본문에 보면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6:4-6 )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도 한번 믿게 된 사람이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뜻으로만 보입니다. 즉 믿은 사람도 타락하면 구원이 취소되고 또다시 믿고 구원 얻을 수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는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해석은 옳지 않은 것이기에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문구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그 말을 하고 있는 저자의 심정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말썽을 피웠을 때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쫓아낸다는 말을 했다고 합시다. 그 말이 한 번만 더 그러면 실제로 쫓아 내버린다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고 하는 엄중한 꾸지람인 것입니까? 당연히 답은 후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신자가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게 되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사를 맛보게 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깊이 생각하라는 의도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사를 말할 때 은사 자체에 매달릴 뿐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은사를 주셨을까?’, ‘나에게 은사를 주셔서 뭘 하려고 하시는 것일까?’ 라고 하는 하나님께 관심을 두기보다는 은사를 받은 자신을 높여 버릴 때 그것이야말로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며 욕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2-23)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엄청난 능력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큰 능력을 행하여도 주님께서 모른다고 떠나가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가룟 유다 역시 다른 제자들과 같은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배신하고 다른 제자들도 다 배신하였는데 어떻게 그들은 제자가 되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성경에서 수도 없이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것이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왔고,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이 세례였고, 다 같이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반석에서 나오는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입구에서 믿지 못하여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들은 다 천국을 갔을까요? 아니면 지옥을 갔을까요?

그래서 성경은 개인의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풀리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아야 풀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만 높이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름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높이는 차원에서 보면, 마태복음 7장은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것 같은데 그 속으로는 노략질하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위하여,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능력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주님의 뜻대로 쓰일 뿐입니다.

악한 자도 악한 날에 필요하여 주님께서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다고 하였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10-11)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골로새서 1장에도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16)라고 하여 천지의 만물이 다 주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사,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을 높이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대표로 모세를 보고자 합니다. 모세는 왜 못 들어갔습니까? 민수기 20장에 보면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0:7-12)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서 물을 명하여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이나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12절에 모세를 향하여 믿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기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는 것은 두 번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17:6)고 하여 여기서는 반석을 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번 침을 받은 반석이 두 번 침을 받을 이유가 없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반석에게 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고 하여 이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반석을 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요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한 번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반석이 치라고 하시지 않고 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 앞에서 분명히 깨지지 말아야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무효한 것으로 돌리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구원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이런 것에 있지만 성경은 이렇게 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한번 고난받으신 것으로 충분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의 도구인 것입니다. 주인집의 사환인 것입니다. 아들을 높이기 위한 사환이라는 것을 히브리서 3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셔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높이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하나님께서 물으시고 최종 심판의 근거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대단한 능력을 행하였는가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완전함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지금 우리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고, 구원을 얻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도 오늘 본문의 내용을 구원의 문제로 쉽게 연결하여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의 초보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세례, 안수, 부활, 심판 등 이 모든 것들이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산물들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생명의 빛을 공급받고 생명의 나라에 대해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은총을 베푸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하늘의 은사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를 신자다운 삶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이 그 이유이겠습니까? 아니면 신앙 또한 자기중심에서 자신을 위한 것으로 전락시키라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구원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은사를 맛보게 하신 것,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게 하신 것, 이 모든 것들을 오직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인 것으로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으로 안주 해버리는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이며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내가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타락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 자기중심적이고 또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일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나를 신자 되게 하시고, 은혜를 알게 하시고 또 성령에 참여한 바 되게 하신 것은 나를 그렇게 만드셔서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신자다운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무엇이든 날 위해서만 구하게 됩니다.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은혜를 받아서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은혜를 나에게 세상의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여 은혜를 구하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뻔한 것입니다. 은혜받음을 자기 편함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버려야 할 도의 초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의 빛으로 비췸을 얻게 하시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게 하시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게 하시고,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게 하신 뜻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기 위해 그러한 것들로 채우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맛보게 하시고 베푸신 모든 것의 뜻을 묵살하고 짓밟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6절 뒤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6:6 )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의 종교 생활은 우리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3. 주의 뜻

그렇기에 나는 그런 신자가 아니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한다는 것을 예수님을 배반하여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욕하고 핍박하는 등의 행동으로 오인하기 때문에 나는 이 말에 해당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중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두 번 못 박는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헛되이 죽으신 것으로 만듦으로서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자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늘의 은사를 맛보게 하셨다면 그 맛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맛보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맛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책임이 맛본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자기중심에 머물러서 나만 맛보고, 나만 은혜받고,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식의 삶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됨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주시고 맛보게 하셨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뜻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맛본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있음을 안다면 그 주신 것을 전하고 나누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신자다운 것이고 우리의 할 일인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마시고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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