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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부활이 만든 나라

본문 / 6: 1-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1)

 

1. 구원의 영역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는데 있어 예수님의 죽으심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구원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충분히 수긍하고 납득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치우친 생각, 즉 우리의 구원을 죄사함이라는 측면에서만 너무 집중하기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들 놓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고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구원을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오셨고, 우리가 아무것도 한일 없이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구속하셨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인 것입니다.

구원을 그렇게 은혜로 받다 보니 구원 이후에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 구원 이후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나마 좀 한다는 분들도 예수를 믿은 후에는 신앙윤리와 도덕차원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지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 문제의 답을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2)라고 합니다.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구원함을 얻었는데 어떻게 죄를 또 지을 수 있겠느냐 경건하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잘못되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로마서 6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과 부활은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자로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0-11)라고 합니다.

여기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는 말씀을,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난 자가 그리고 하나님 대하여 산 자되어 하나님 안에 속한 자 된 자가 죄를 지으면 안 되는 자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맞지만 다 맞는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13-14)라고 합니다.

여기서 죄사함이란, 죄인 된 자리에서 구원받은 자리로 오는 신분의 변화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가 다른 영역의 변화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죄가 다스리는 나라로부터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옮겨온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다는 개념만이 아니라, 구원은 한 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이사 가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바로가 항복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영역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애굽과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 사이에는 홍해가 가로 놓여 있으며 그래서 이 둘은 서로 왕래할 수 없는 분명하게 분리된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홍해를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넘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넘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바다를 밑으로 건널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다 죽었다는 상징적인 개념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백성이 바로에게서 놓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죽는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어야지만 바로의 통치권이 이스라엘에게는 해당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내용을 로마서 7장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7:1)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죽어서 없어짐으로서 애굽의 통치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은,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아니라 홍해에서 나온 자들인 것입니다. 새로 생긴 존재들인 것입니다. 새로 생겼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 누구의 밑에 들어가 있지 않은 자유인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사는 나라

예수님이 하신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 하여 죄인의 신분이 되었기에 그의 후손인 우리는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인류를 대표하여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아담의 후손된 그 인류는 죽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죄인이었던 인류가 없어졌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어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조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잘 설명해 놓은 것이 로마서 5장입니다. 12절부터 보면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12-21)고 합니다.

이 말씀을 더욱 더 요약하여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5:20-22)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의 결론이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아닌 홍해에서 나온 새로운 자들, 즉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구원을 논할 때 우리는 분명히 흑암의 권세로부터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온 자들이라고 하시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다시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지금도 통치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거나, 나한테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은혜로 주시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어서 은혜를 오해하는 자들과 죄사함을 받고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가지는 답답한 질문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의 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우리는 이제 구원 받아 죄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왔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삶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그의 통치를 받는 자들은 세상과 연합되어 세상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저들과는 다른 거룩함과 하늘의 부요함과 행복한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들의 됨됨이와 우리의 됨됨이가 다르고, 저들의 사회생활과 우리 사회생활이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종교화 된 형태적인 싸움이 아니고 내용적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하여 에베소서 4장에 보면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4:17-19)라고 합니다.

저들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없는 자들의 삶은 전부 허망하고 방탕함입니다. 여기서 허망하다는 것은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울 수 없고, 기준도 없는 자들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의미 없이 소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진리와 생명의 근거자이시기에 하나님 없이는 목표와 기준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자들입니다. 20절에 보면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4:20)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진정한 가치를 배웁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얼마나 영광되고 복된 존재인가를 확인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가 아닌 참된 영혼의 만족을 주 안에서 얻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만족은 세상의 것으로는 채울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차원에서 구원은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대로 완성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예수 안에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단지 죽은 자리에서 살았다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하신 진정한 충만의 자리로 우리를 어떻게 항복시키고, 어떻게 채워 가시는가를 확인되는 자리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예전엔 죄가 다스리는 나라에 살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은혜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에 들어와 살며 그것을 배우며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1-24)고 하는 권면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은 얻었으나 아직도 구습이 남아 있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지금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우리의 신분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구원을 취소시키지는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나라는 법으로 다스리지 않고, 은혜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정죄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끄러운 신자라는 것은 늘 확인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했다고 고백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우리를 다스리는 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자된 것을 취소시키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그 일을 취소시켜야만 됩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완료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가장 튼튼한 근거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구습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권면과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싸움과 신앙의 의지와 책임의 싸움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는,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애를 써야 했고, 노예 된 신분으로서 원치 않는 일도 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사는 삶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부른 받은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과 부르신 목적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고, 안 짓고 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아래서 우리에게 허락한 자유와 진리와 생명이 가지는 무한한 약속들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통치에서 취소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함께 주신 모든 것을 누리며 사는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모든 것에 대한 구약적인 설명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즉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복 주시려고 통치하시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묶여있기에 취소될 수 없는 신자들의 권리요 신분인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자들인 우리가 이것을 놓치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자

그런 자들에게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16-23)고 합니다.

우리가 그 전에 살던 나라는 우리 마음대로 살던 나라였습니다. 죄가 우리를 다스려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죄일 수밖에 없는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생명과 진리로 우리를 다스리는 나라에 있습니다. 이걸 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고 합니다. 우리는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그 삶이 가능한 자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도 죄의 습관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실수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수한 일에 묶여 허망하고 방탕하게 살지 말고, 나머지 삶을 자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으로 우리의 삶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패까지도 주 안에서 헛된 시간이 되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잘못을 한 사람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따뜻하게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 실패한 것으로 마치 전부를 실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 와 있는 것 자체까지도 불신하게 됩니다. 마치 신앙이 모두 나에게 달려있고, 내 의지의 싸움에 달려버린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어리석게 하나를 실패했다고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하나 성공하고 전체를 성공한 것처럼, 다 된 사람처럼 교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잘했다는 생각하는데서 무슨 열매가 나오는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데서 무슨 열매가 나왔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잘했든 못했든 성령의 열매가 나와야 합니다.

내 실패로 겸손해 지고,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면 성령을 좇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잘했다는 것으로 자신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여 연약한 자들을 못나게 보고 살아가고 있다면 육체를 좇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잘한 자가 칭찬 받고, 못한 자가 책망 받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통치의 열매가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자랑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옳고 바른말 한답시고 싸우거나 눈에 힘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육체를 좇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도 실패도 하나님이 목적하신 완성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진정한 구원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가 어떤 구원을 받았는가를 아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못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잘했다 못 했다에 집착하지 마시고, 보다 넓게 우리의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신앙의 승리를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성공도 실패도 하나님이 목적하신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그분의 통치 영역에 있음을 확인하시어서 우리의 믿음에 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아래 사는 모든 성도들의 삶이 우리의 현실임을 아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도들의 승리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사시는 우리 모두의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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