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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복음

본문 / 1: 6-10

 

 

1. 은혜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모이는 것도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일주일에 하루는 푹 쉬어야 하는데 오늘처럼 예배당에 오면 쉬지 못해 피곤하게 되고 또 오게 되면 헌금도 해야 하니 경제적으로도 손해가 됩니다.

그런데 왜 모이는 것입니까? 그러한 희생을 하고서라도 천국에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그러나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허락한 자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아무리 힘쓰고 애쓰고 달음박질 한다고 해도 천국은 열려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3-16)고 합니다.

야곱과 에서나 태어나기도 전에 미움 받을 자와 사랑 받을 자가 결정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원하고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과 상관이 없다는 말에 아멘이 되십니까? 구원은 오직 주의 긍휼로만 되는데 그 긍휼을 입는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물론 우리가 볼 때는 하나님 마음대로이지만 하나님은 창세전의 언약대로 일하시기에 한 치의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렇기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도 사도들의 실력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전하여 준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는 것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서 피를 뿌려 언약을 체결하고서도(24) 모세가 언약증서를 받아오는 40일 기간에 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처럼(32),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복음을 받은 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자 너무나 쉽게 떠나는 것을 보고 바울사도가 이상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복음 그리고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2. 복음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아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고,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성별(구별)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에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어 구별했습니다. 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장차 오실 기름부음 받을 자인 메시아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약 전체가 오실 메시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된 것은 자기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1:10-12)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난과 영광을 증거 한 것이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우리에게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복음을 전한 자들이나, 신약에서 복음을 증거 한 사도들도 그리고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까지도 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결과로 인하여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은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아 죽는 죽음입니다(21:23). 율법을 외우다 시피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저주받은 죽음으로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섭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떡을 주고, 병을 고쳐주었을 때에는 자신들의 메시아라고 임금을 삼으려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고개를 돌이질 하면서 침을 뱉고 돌아선 것입니다.

이 저주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3:13-14)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5장에도 보면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17-21)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에게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셔서 죄의 결과인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예수님께서 당하심으로 그 안에서만 유일하게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변개시킬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들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만 믿어서 안 되고 율법도 지켜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할례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15:1-2)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15:11)고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 믿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내린 복음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 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6)고 합니다.

왜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까? 인간은 범죄 후에 인과율에 빠져버렸습니다. 어려서부터 배운 것이 세상엔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배운 것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우리 속에 장착이 되어 태어납니다.

은혜가 없는 세상, 오직 나의 행함으로만 살아남는 세상은 지옥인데도 마귀는 이런 지옥을 마치 천국인양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창조와 구원의 은혜를 떠난 인생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의존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런 은혜가 너무나 낯설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세상에서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내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이런 은혜의 복음을 듣고서도 다른 복음을 제시하면 그곳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할례를 언급하지만, 오늘날에는 더 많은 것들로 다른 복음을 듣게 하여 떠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떠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번영신학, 기복신앙 그리고 신비한 체험과 기적과 이적을 보여준다고 하는 신비주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시며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표적만이 참 표적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저주를 다 받아내시며 동시에 자기 백성들에게 의의 선물이 주어지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다 이루셨음을 부활로 증명하시고 예수님을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성령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며, 이런 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부족한 것처럼 여겨 자신의 행위를 보태야 한다는 말이 바로 다른 복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부터 보면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7-9)라고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는데 어떤 이들이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라고 8절과 9절에서 두 번이나 말합니다. 사도 자신도 이 복음을 다르게 전하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지만 바울 자신의 복음은 아닙니다.

나의 복음이라고 하였지만 그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에 자신은 종으로 그 복음에 메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조차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3. 저주

오늘 우리가 교회로 오는 것은 저주가 아닌 복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무슨 복입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와 사망아래서 영원한 지옥으로 달려가는 저주 받은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들이 달라는 복은 지옥으로 질주하는 인생에 브레이크를 밟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속을 붙이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이렇게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내리막길로 달려갑니다. 그렇게 가면 벼랑 끝인데 그것도 모르고 그것이 복인 줄 알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안다고 해도 그것을 스스로 멈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자들을 주의 은혜로 부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붙잡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차를 멈추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인생의 성공이라고 여기며 싣고 다니던 모든 것들이 다 전복이 된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자존심도, 자신의 가치도 다 날아 가버리는 그 사고의 현장에 나를 지으신 창조주가 죽어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십자가와 부딪히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가게 되는 인생을 성도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합니다. 우리를 이런 세계로 이끌어 가시는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좋아하십니까? 우리는 앞에 로마서에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그 말씀은 창세기에 나오는 말씀이고, 이것을 말라기 선지자가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1장에 보면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1:2-5)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며 대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은 죽도록 고생을 했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에서는 할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부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사병은 318명이지만, 에서는 400명입니다. 에서는 고생 안하고 부자 되고 강한 성벽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야곱은 많은 고생을 하며 바로 왕 앞에서는 자기 나그네 인생이 험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게 무슨 사랑인 것입니까? 에서는 자기의 힘으로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무너뜨림을 당하여도 다시 쌓으리라고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하는 자기 힘으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백성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야곱이 믿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털어버리십니다. 얍복강에서 환도 뼈가 위골되어 도망갈 수도 없는 신세가 되며,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음행도 합니다. 사랑하던 라헬은 빨리 죽고, 그가 낳아 사랑하던 요셉의 죽음도 경험합니다.

야곱은 이렇게 다 털리고 나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다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붙들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복음을 전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자꾸만 인간의 행위들을 보태어 다른 복과 다른 가치들을 원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데 그 저주가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9장에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고 합니다. 바울이 자기 형제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도 그들이 돌아온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주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세상의 실패가 저주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저주받았다고 하는 그런 삶이 저주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내게 더욱 더 뚜렷하게 보여 진다면 우리는 영원한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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