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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본문 /   3:10-14

 

1. 저주 받은 

오늘 설교 제목은 오늘 본문 10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설교제목으로는  섬뜩하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은 모두가 기피하고 싶은 말이라서 설교제목으로는 합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저주 받은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저주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난  땅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미 저주 받은 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시는데  저주 받았다고 하느냐며 항변하고픈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부터 보면 이미 땅이 저주를 받았음을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7-19) 합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창세기 3 이후의 인간이니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저주 받은 땅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수고하다가 저주 받은 땅의 티끌로 돌아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이런 저주 받은 땅이지만 하나님의 창세전의 언약,   아들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날지를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함께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으로 말씀하여 주시고 또한 가죽 옷으로 가려주심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아담의 아들들 사이에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들이 가인이요,  다음의 아들이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을 양을 치는 자였는데   자신들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이미 저주 받은 땅에서 나온 소산물이며, 이미 범죄  아담의 후손들이기에 그들의 제물을 받고 아니 받고는 오직 하나님의 용납하심에 달려있습니다.

만약에 제물을 받아주시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고, 받아주시지 않으시면 당연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자 가인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경고하셨지만 그러나 이미 죄는 권세로 나타나기에 죄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아벨을 돌로  죽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입을 벌려  손에서부터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0-12)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아벨의 피가 흘려진 땅이 저주를 받아  효력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이 펼쳐지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전쟁에서 여인의 후손으로  자들의 모습은 뱀의 후손들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과 같은 모습으로 역사 속에서 등장합니다.

이런 저주 받은 땅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전혀 믿음이 없는 우상 섬기는 집안에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믿음의 훈련을 시키셔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면서 ‘열국의 아비 되게 하시는데, 그가 열국의 아비가 되었다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저주 받은 땅에서 받은 복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에 대한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430년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의  아래 갇혔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율법을 받은 자의 눈이 뜨여지지 않아서 여전히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받고서는 것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자신들이 치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는데 오히려  율법으로 자신들의 의로 삼았기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율법의 의로는 결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가 없고 오직 저주아래 들어갈 뿐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지금 구약 성경으로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의 의로 사는 자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0) 합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합니다.  근거를 신명기 27장의 말씀으로 증언합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7:26) 합니다.  말씀은 에발 산에서 복과 저주를 선포하고 아멘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율법의 선생들이 타협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해석을  왔습니다. 이런 모습은 처음 아담과 하와에게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하여 보태고 빼고 비틀고 덮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뱀의 유혹에 대하여 하와가 대답을  때는 창세기 3장에 보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3:3)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빼고 보태고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귀의 특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와의 대답에 대해 마귀는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것을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명목 아래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도 조금만 부담되는 말씀이 주어지면  말씀에 부닥쳐 보지도 않고 은혜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희생과 손해를 감수하지 않고  자리에서 도망쳐 버립니다.

마땅히 서로 짐을 져야하는 부분인데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닌데도 지금은 은혜시대인데  하면서 도망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은 자기의 사욕을 따르는 것이지 그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은혜란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아무리 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스스로 벗어날  없음을  뿐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죄에서 해방된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게 되는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대로 살면서 죄를 즐길 요량으로 은혜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은 결국 말씀을 보태고 빼고 비틀고 덮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3:11) 합니다.  말씀은 하박국 2장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데,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하박국 1장부터 보아야만 합니다.

하박국 1장에 보면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1:1-4)라고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보니 한마디로 엉망진창인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어찌 하나님이 이런 일을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어야   땅에 내가 보아도 온통 강포와 죄악과 패역과 겁탈과 변론과 분쟁이 가득한데 어떻게 하나님의 눈은 정결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꼴을 보고 계십니까?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집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항의를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며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의 눈으로는 이러한 하나님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시다면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신원하여 주셔야 하는데 그런 하나님이 하박국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인의 후손들은  당하는 모습이고, 뱀의 후손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말씀의 배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행위대로 갚으셨다면 하박국 선지자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의지한다면   사람도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 신약이 아니라 구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가 3장부터 시작된  저주가 구약의 마지막 성경의 마지막인 말라기 4장에 보면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4:5-6) 합니다.

 말씀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서의  마지막 장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이 있고 제사가 있고 성전과 제사장이  있었지만  마지막이 저주인 것입니다. 그러면  저주의 선포로 끝이 나는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이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를 보내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크고 두려운 심판과 저주로  땅을 친다고 하시는 것이 구약의 마지막 절입니다.

여기서 오리라고  엘리야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천국을 몰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버지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분노가 일어났는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9.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바리새인이 아니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8:9-14) 합니다.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사람은 바리새인이며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것은 자신이 의롭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세리와도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자신은 이레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고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의롭다 함을 받고 내려갔습니까?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내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자기 스스로 의로운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뱀의 후손들이며  아비가 마귀인 저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율법은 믿음에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3:12)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믿음에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가운데서 살리라고 합니다.

율법을 행한다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 행하면  가운데서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율법을 항상 지켜 행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는데 도리어 그러한 율법으로 자기 의로 치장하고 살았으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를 가진 자들은 예수님을 결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처럼 의로운 자를 구하러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기에 그런 메시아는 율법 지키느라고 수고한 자기들만을 구원하시는 것이지, 율법도 모르고  알아도 지키지 못하는 그들이 저주 받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눈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저주 받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3. 주의 십자가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말씀은 신명기 21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날에 장사하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3) 합니다.

그러므로 나무 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율법을 알고 지킨다는 자들은 반드시 저주로 보이게 됩니다.  저주 받은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메시아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있을  없는 이단 중의 이단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가장 핍박한 자들이 바로 이방인보다 유대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내가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2:9)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사탄의 회당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누가 사탄의 회당들인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인간의 실체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를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단지 구색용일 뿐이고, 교묘하게 온갖 인간의 행위들을 부추겨 내는 것으로 십자가를 대치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교묘하여 겉으로는   수가 없도록 위장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그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자랑하지만 십자가를 믿는 인간의 행위도 함께 자랑하느냐로 분별이 됩니다.

여기서 주의할 글자가  입니다. 에는 사람의  어떤 행위나 공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로나 에는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끼워 넣으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아직도 저주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허물이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에 보면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렇게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일이 바로 성령의 역사함인 것입니다. 이렇게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사람은  없이 벌거벗고 십자가에  박혀 죽으신 예수님 외에는 달리 바라볼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인하여 자신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나무에 달려 저주 받아 죽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외에는  말이 없는 사람들이 창기와 세리와 강도와 동급인 이방인인 우리들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의 대신 저주 받음 때문에 영원한 저주를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을 받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복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의 행위를 믿는 것이 저주임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박히면 알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박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박힌 강도에 대입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모든 인류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박힌  강도와 같다고 봅니다.

그런데 가운데 계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3 13절의 말씀대로 어떤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없으신 분이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양편의 강도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저주 받아 죽는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저주 받은 땅에서 저주 받아 죽어가야  십자가의 강도와 같은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니하고 항변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한번이라도 우리가 강도 아닌 적이 있었습니까? 날마다 주님의 것을  것이라고 우기며 살고 있는 자들이 우리인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인양 살아가고 있는 날강도와 같은 자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강도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나나 너나 함께 저주 받아 죽어가는 주제에 네가 정말 메시아라면 너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여 보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한편 강도는 자기 죄를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줄 알았습니다. 자기는 죄로 인하여 이런 저주를 받아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이 저주 받으시는 분이신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십자가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십자가의 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강도가 천국에서 속옷만 입고 돌아다닌다는 망발을 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다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자들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저주를 받으신 것이 하나님께 철저하게 버림받는 저주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저주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와 하나이셨기에  고통과 저주를 아십니다. 그런데  저주로 인하여 마땅히 저주 받아야  자기 백성들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와 저주를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들이 자신의 죄와 저주를 알기에 대신 저주 받으신 십자가의 그늘 아래 피하는 것만이 참된 안식임을 알고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만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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