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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본문 / 5: 1- 6

 

1. 푯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든 타임스에 보면 길을 가는데 트럭에서 붉은 깃발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깃발을 다시 트럭에 올려주기 위해 깃발을 흔들며 트럭 뒤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 뒤로 수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의 따라 가는 사람들이 시위대라 그만 주인공도 같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위대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본 다른 많은 군중들도 그냥 따라가는 것입니다.

군중심리와 3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별 의미 없는 일을 세 사람 이상이 할 때 사람들은 별 의미 없는 그 일에 관심을 갖고 따라 동조하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었던 분은 젊은이들은 흔들 수 있는 깃발과 목숨 걸 대상을 찾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어느 목사님이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는 복을 받자고 하는 결론의 설교를 하면서 우리가 흔들 수 있는 깃발과 목숨 걸 대상을 성전 건축으로 삼자고 하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수많은 깃발들이 있습니다. 학교에도, 도시에도, 국가에도 다 자기들의 고유한 깃발이 있습니다. 심지어 친목 단체인 산악회, 동호회도 깃발을 만듭니다. 그 깃발을 들고 그리로 모이라고 합니다. 세상만 깃발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도 깃발이 있습니다. 교단마다 교단 마크가 있듯이 사람들은 특정한 깃발 아래 모여들려고 합니다. 전쟁을 해도 자기의 깃발을 상대방의 고지에 꽂음으로 승리를 표시합니다. 누가 더 선명하게 강하게 깃발을 들고 가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그런 곳으로 모여듭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깃발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3장에 보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4)고 합니다. 깃발을 푯대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푯대가 무엇인지를 빌립보서 3장 전체에서 말씀합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 하듯이 빌립보 교회도 할례파와 그리고 그 할례파의 영향을 받는 자들을 책망합니다. 이런 것을 육체라고 말입니다.

바울 자신이 얼마나 육체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자신의 과거 유대인으로서의 이력을 말하고서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할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기에 그 죽으심을 본받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달려갈 푯대며 깃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며 위에서 부르신 상을 바라보고 달려간다고 합니다. 그 상이란 황금보석으로 꾸민 평수 넓은 아파트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상입니다. 그런데 여러 번 눈물로 말하였지만 지금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며 그들의 신은 배며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자는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에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원수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육체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행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 전도한 것, 기도 많이 한 것, 성경공부 많이 한 것, 일부러 힘든 개척교회 찾아가서 봉사한 것, 다른 사람들이 마다하는 힘든 선교지역을 택하여 간 것, 다른 교회는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도입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다른 곳은 교회에서 온갖 경쟁을 시키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곳은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강조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 등등 오늘날의 교회는 온갖 깃발들이 가을 운동회의 만국기 모양처럼 펄럭거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종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2. 거짓 자유와 참 자유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고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한 것은 바울만의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회의에서 이미 결정 난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15:8-11)고 합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자신들의 조상들도 메지 못한 멍에가 율법의 멍에임을 말하며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만 구원 얻는데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율법을 자신들도 멜 수 없는 멍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절부터 보면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2-4)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만 구원을 얻는데 여기에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만약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고 하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10)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하나만 지키지 못해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0)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있는 자가 없기에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주 아래 있다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 것도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보고 듣고 말하고 그렇게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춰서 성경을 각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만약에 할례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언약을 배반하고 옛 언약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도 지킬 수 없는 옛 언약으로 들어가는 것이 저주아래 들어가는 것이 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시고 또 모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아무른 유익이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다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하여 들어가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인 것입니다.

오늘날 사탄이 하는 일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른 유익이 없도록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지 못하도록 만들고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하든지 그 은헤에서 끊어지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마귀의 제일 목표인 것입니다. 종교적인 다른 모든 일들은 다 하도록 내버려 두지만 그 은혜를 알지 못하게 또 누리지 못하게 하여 은혜에서 끊어지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시편 2편에 보면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22:1-6)라고 합니다.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데 그것은 세상의 군왕과 관원들이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들의 맨 것을 끊어버리자고 합니다. 군왕과 관원들과 세상의 배후세력인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비웃으시며 시온에 왕을 세우시는데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는 자가 구원을 얻고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도록 하여 그리스도를 끊어버리게 하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행위주의와 공로주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상이 다 가르치고 말하는 바이며, 종교들 간의 대화를 한다고 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내는 공통점은 거저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 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기 위하여 인간들이 평소에 원하는 것을 다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무엇으로 유혹하였습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만한 것으로 유혹합니다. 인간의 모든 유혹은 이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경제적인 기적, 종교적인 기적, 세상의 영광을 준다고 하는 그 유혹들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십자가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성령운동을 한다는 자들이 오히려 이상한 표적과 기적을 행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말씀보다는 자신들의 체험과 표적들을 더 신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보면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9-12)고 합니다.

사탄도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보여줍니다. 이들에게 미혹되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심판을 받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만이 아니라 신비주의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만듭니다. 이러한 내용은 그래도 우리가 어느 정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교묘하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만드는 세력도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이제 거듭났기에 성령이 임한 우리는 우리의 자원과 노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개혁주의라고 말하든지 또는 성화라고 말하든지 간에 이렇게 되면 세월이 가4면 갈수록 고급한 신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가면 갈수록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는 점점 줄어들고 거듭난 나의 멋진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면 이것도 은혜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자기 가치 챙기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문제는 이런 것까지 아는 우리는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우리가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보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의의 소망을 기다림

그러면 종에서 벗어나 아들이 된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어가십니까?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5)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 만약에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점진적으로 좋아지고 나아진다면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냥 내가 완성되어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믿음으로 의의 소망이 임하기를 기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단장하여 가져갈 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랑하기 위하여 기다리겠지만,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는 사람은 완전한 의의 소망이 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고 합니다. 할례도 무할례도 효력이 없습니다. 나는 할례를 받았다 또는 나는 할례를 받지 않고 바로 믿었다 하는 것들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종으로 일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522절부터 보면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고 합니다.

여기 열매라는 말은 단수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여러 가지 덕행이 성령의 단일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여러 방면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덕행을 열매라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사람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일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성령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도 없지만 사람이 금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81절부터 39절을 요약하여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탄식하며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탄식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탄식 소리를 듣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지금 말할 수 없는 탄식 속에 있습니다. 이런 탄식의 세상에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이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어떤지를 알기에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기다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받은 자녀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종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는 자들이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행위로 평안을 찾고 만족을 찾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실체를 더욱 더 알아가며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길이와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우리의 나중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크신 은혜를 알아 더욱 더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은혜를 맛보아 누리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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