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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선 것을 보거든

본문 / 13:14-23

 

1. 종말의 시각

우리나라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이야기 되었던 내용 중에 하나가 한반도 비핵화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는 핵무기가 없는 곳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만큼 핵무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무시무시한 무기인 것입니다. 그런 핵무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 수없이 많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 지구는 아주 위험한 물건을 많이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한반도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항상 불안감이 가득하다고 하는데 도리어 우리는 아예 그런 문제에 대해 의식하지도 않은 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들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셨고 그것은 아주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 받은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별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고 또 하나님의 일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말과 환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신의 일에 몰두한 채 자신을 위한 일에만 바쁘게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과 환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보시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이 세상을 보시는 것처럼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시각으로 종말을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의 관심은 종말의 때에 나를 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을 갖게 되면 자연히 세상의 것은 종말의 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되고 따라서 세상의 것이 자기 수중에 차고 넘친다고 해도 종말이라는 시각 앞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땅의 것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야지만 있는 자라고 합니다. 즉 사람의 있고 없고의 문제가 땅의 것을 얼마나 소유 했느냐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말이 닥치게 되면 땅의 것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땅에 속한 그 무엇도 종말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때에는 많은 물질과 높은 권력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해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를 그러한 심판에서 건지며 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정으로 가진 자입니까? 때문에 세상을 종말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는 믿음이 무용지물이고 쓸모없는 것으로 천대를 받지만 종말의 시각 안에서는 진정으로 가진 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 자였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그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을 종말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게 되면 세상에서 힘이 되지 못하는 믿음을 가볍게 여겨버립니다. 이러한 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인내하라고 하시는 것은, 믿는 것이 고생이기 때문에 인내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붙들고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우리는 하늘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심판이 선포된 이 세상에서 버티고 견디며 살아가는 자로 존재할 것입니다.

 

2. 종말의 징조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13:14)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는 것이 곧 종말의 징조임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는 세상의 현실을 볼 수 있는 시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이 선포된 멸망의 곳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는 현실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만 있으면 세상도 살만하다고 외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돈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며 돈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시각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가 산으로 도망을 쳐야 할 긴박함이 있는 곳으로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멸망의 가증한 서지 못할 곳은 어디인 것입니까? 같은 말씀을 마태복음 24장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24:15)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거룩한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다니엘서 9장의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9:27)고 하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성전이 이방인에 의해 짓밟히고 더렵혀질 것에 대해 내용입니다. 장차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성전 또한 무너질 것에 대해 예언한 말씀인 것입니다.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히거든 유대에 있는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13:15-16)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땅에 속한 자기의 것을 챙기기 위해서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의 것을 챙기기 위해서 이러는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함께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집에 있는 땅에 속한 것은 아무런 미련도 두지 말고 도망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땅에 속한 것이 환난의 때에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임을 안다면 우리에게 귀한 보화가 있고 없고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 것입니다. 이것이 환난을 아는 신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세상에서 내 것을 챙기고 내 것을 많이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내 수중에 무엇이 있든 그 모든 것들은 종말의 때에 나를 살릴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주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라보는 그것이 신자를 가난한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믿음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무엇을 가진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부요함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자리에서 거룩을 가장하여 사람들을 세상의 복으로 미혹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이기 때문에 신자에게 세상은 종말을 피할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한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꿈을 두고 소망을 둔다면 그것이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세상의 심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을 보게 되고, 상한 심령이 되어 주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보지 마시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인 세상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신자인 우리의 시각에 비로소 종말이 보일 것입니다. 또한 17절부터 보면 “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3:17-18)고 합니다. 여인에게 아이는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평소에는 그처럼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해도 환난의 때에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로 이 말은 실제로 아이가 거추장스러운 존재니까 아이를 낳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평소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도 환난의 때에는 변함없이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도 변함없이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의 곁에 있을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도 겨울에 도망을 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유대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하고 살겠습니까?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다윗 시대 때의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기에 기도를 한다면 메시아가 빨리 도래하기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오늘 예수님은 큰 환난을 예고하시고, 그 환난 때에 도망을 치는 문제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것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 또한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복과 영광이 중점입니다. 늘 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로 고민하기 때문에 환난의 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형편이고 당시 유대인들의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 본문의 “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13:19)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지진으로 인해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며 사람이 죽어 나가는 참혹한 현장에서 외쳐지는 것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재난이 있는 현장에서 종말을 외친다고 해서 사람들이 세상의 마지막을 감지하며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어떤 참혹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고 해도 세상은 말씀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토록 완악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오늘 본문 20절부터 보면 “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21.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13:20-23)고 합니다. 환난은 우리가 대비해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환난을 대비하라고 외쳐도 사람들은 보이는 세상만을 믿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대환난이 있다고 해도 자연현상으로 여기면 그만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믿지 않는 것이 인간이며 따라서 모든 인간은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왜 멸망을 당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실물교재인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택하신 백성을 위해 그 날들을 감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은 것이 됩니다. 환난의 때에 구원 얻을 육체가 없는데 우리가 구원 받을 자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또 성경에서 거룩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거룩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으며 또 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성전이 그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한 길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의만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은 예수님의 의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기 행함을 동원하여 자기 의를 만들어 내고 그 의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의는 다만 형식적인 고백에 불과할 뿐,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자기 의 뿐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이것이 눈에 보이는 성전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는 자신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자신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그런 성전 외에 다른 거룩한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구원의 길로 여겼던 것처럼 우리도 구원의 길을 다른 것, 즉 우리의 도덕적인 선행이나 종교적인 행위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이며 또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인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가짜가 성행합니다. 참된 것은 배척을 받고 거짓된 것이 환영을 받는 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어둠의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역시 진리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둠의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자연히 산으로 도망을 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은 왜 세상에서 도망을 쳐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라는 것은 실제로 산으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진 자로 사는 것에 삶의 목적과 방향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만 살지만, 신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다고 해도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진심으로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종말의 세상에서 생명의 능력이 되는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래서 신자는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가치가 세상적 시각으로 평가 받지 못하지만 이 모든 것이 종말의 때에 명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믿음에 붙들려 믿음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종말적 시각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살의 증상은 어떻게 드러난다고 합니까?

3. ‘그때에는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는 주의 말씀이 긴박하게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지붕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 말고 또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돌이키지 말라는 의미 는 무엇입니까?

5. 신자의 부요함은 어떻게 나타나며 또 그런 신자는 무엇이 보인다고 합니까?

6. 아이 밴 자와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며 또 그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 하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7. 예수님의 기도하라는 권면에도 기도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예수님께서 그 날들을 감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9.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무엇이 거짓 그리스도이며 또 무엇이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까?

11. 예수님의 그 때에는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2.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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