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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

본문 / 막14: 1- 9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14:1-9)

 

1. 기독교 신앙

우리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해 세상의 이치와 이론에서 어긋남이 없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은 세상 시각으로는 결코 합리적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이론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우리들에게 주를 위해 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주를 위해 살면 복이 주어진다는 것도 아닙니다. 주를 위해 살다가 죽는 길로 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즉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결코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한 여인이 아주 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그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고, 한 데나리온이 그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인 것을 감안하고 오늘날 노동자 하루 품삯을 10만원으로 계산한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약 삼천만원의 액수이며 일반인의 일 년치 수입이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그러한 가치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바 되었다는 것은 이 여인은 아주 대단한 일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여인의 이러한 행동을 본 어떤 사람들이 “4.~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막14:4-5)라고 합니다.그 값비싼 향유를 그렇게 허비할 것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더 가치 있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의 여인의 행동과 그러한 여인을 책망하는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고 해도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고, 심지어는 굶어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고, 주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의 정신을 드러내는 일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향유를 팔아 그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더 칭송을 받고 영광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모두도 오늘 본문의 향유를 부은 여인을 책망하는 사람들과 같이 그러한 생각을 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14:6)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한 사람과 향유를 부은 여인을 나무라는 사람들처럼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곧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가령 우리들이 사람에게 좋은 일, 즉 세상이 생각하는 착한 일을 하면 분명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일을 한 우리들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달으며 예수를 믿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말이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14:7)고 말씀하신 것처럼 신자는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여인의 행위를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이 여인의 행위가 어떻게 예수님께 좋은 일이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14:9)고 하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 좋은 일은 예수님의 그러한 죽으심을 나타내고 부각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이 행한 일도 말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을 해도 예수님의 죽으심이 함께 전파되는 것이 참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여인이 부은 향유의 가치는 세상적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을 책망한 사람들은 향유가 갖고 있는 삼백 데나리온의 가격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하면 향유의 가치가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고 또 향유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향유의 가치와 향유의 의미가 사람을 돕는 선한 일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인 것입니다. 교회의 의미와 신자의 의미를 사람들을 돕는 선한 일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통해서 교회의 교회됨이 부각되고 또 신자의 신자 됨이 증거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적 시각으로는 그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그 길을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살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는 생명의 길이 열리는 참으로 존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존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나타내는 여인의 향유를 붓는 행동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때문에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기억되어야 할 여자가 행한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존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가장 존귀하고 거룩한 일인 까닭은 죄인된 우리에게는 새롭게 사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자들의 눈에는 여인의 행동이 비싼 향유를 쓸데없이 낭비해 버리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 사건에 자신의 존재 전부를 맡기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가장 존귀하게 바라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를 헌신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 의미는 뻔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소중한 것, 즉 재물과 몸으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여인의 행위를 그러한 헌신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헌신은 없습니다. 여인의 행위를 헌신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그 헌신은 예수님을 죽으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함께 전파되어야 하는 것은 재물과 몸으로 하는 봉사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자신을 생각했다면 향유를 예수님께 부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생각했다면 사람들의 말처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을 것입니다. 그것 또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대단한 일일 수밖에 없기에 그 일을 한 여인의 이름이 부각되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본문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책망한 사람들은 인간의 이름과 인간의 영광을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비록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해도 그들에게 존귀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름과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26:6-9)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을 나무라는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여인보다 못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돌아 보셔야만 할 것입니다.

 

3. 바른 신앙의 삶

신자가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이름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봉사도 아니고 헌신도 아닙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그것으로 자신이 살고자 하면 안 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신자의 모든 일은 죽은 나를 살리신 예수님의 죽으심이 증거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은 무익한 종임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율법을 자신을 살리는 도구로 활용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고하게 하려고 했고 또 구원을 붙들어 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죽이시기 위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긴다면 율법 아래 죽은 자로 나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말씀을 자신이 살고자 하는 도구로 활용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선한 일을 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신자 됨을 확보하고 구원을 확실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살고자 하는 것이며, 구약의 이스라엘과 똑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자신이 살기위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철저하게 죽은 자로 예수님께 나와야만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행한 어떤 일도 선한 일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이 행한 것으로 예수님을 존귀하게 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살렸음을 믿고 또 그 일을 증거 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여인의 행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인의 행위가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사람뿐입니다. 누가복은 7장에도 보면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은 여인이 나오는데 그를 죄인 된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알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존귀한 분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7:48)고 말씀하십니다. 그처럼 자신의 죄인 됨을 잊지 않는 신자에게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가장 존귀한 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예수님께 좋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주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고 또 그 생명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을 잊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이름과 영광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항상 주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다스리고 통치하기만을 원하며 그 통치 가운데서 오직 진리만이 우리의 주인 된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고백 가득한 날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본문 말씀에서 드러난 세상적으로 결코 합리적이지 않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2. 오늘 본문의 여인이 한 일을 보고 사람들이 책망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본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나누어지고 또 그런 우리들의 착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예수님께 좋은 일이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5. 오늘 본문에서 향유 부은 여인을 책망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6.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7.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여인이 행한 일도 말하라고 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신자가 가져야할 바른 신앙의 삶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9. 오늘 본문의 여인과 같은 행함은 무엇이며 또 그런 행함을 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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