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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울음소리와 베드로의 울음

본문 /  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사람은  도당이라 하되 70.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도당이니라 71.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14:66-72)

 

1. 인생의 실상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들은 나름대로 결심이라는 것을  때가 있습니다. 설교가 자신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오게  때에 나도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단을 하는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도 말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들 중에 우리 자신이 결단한 대로 행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같습니까? 저는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형편에 따라 언제든지  마음이나 행동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사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어떤 결단을 했는가를 생각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형편 가운데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환경과 형편에 따라 생각도 마음도 말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절대라는 말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절대라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형편에 매이지 않고, 설사 환경과 형편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예상된다고 해도 자신의 처음 생각과  그대로 행동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기 때문에 절대라는 말은 인간이   있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있는 말이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14:31)라고 자신 있게 장담한 것도 자신에게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닥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서 큰소리만 치는 헛된 자신감이었음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앞날에 대해 전혀 예상을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에  누구도 어떠한 결정과 일에 대해 장담할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실상임을 우리는 항상 잊지 않고 살아야만  것입니다. 지난  말씀에 예수님을 붙들어  제사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것으로 인해 자기 옷을 찢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형을 받을 자로 정죄 하고는 침을 뱉고 주먹으로도 예수님을 칩니다. 이런 광경을 대제사장의  뜰에서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도 목격을 했을 것이고,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2. 악한 인간의 사는 방법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를 보고는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14:67)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정죄가 내려진 상황에서 그러한 예수와 함께 있었던 제자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면 예수님을 잡아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무리를 뿌리 뽑기 위해서라도 베드로를 잡아 죽이려고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한마디에 의해서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부딪히게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들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과 같은 이러한 상황이 아닌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신 현장에서 오늘 본문처럼 누군가가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한다면 그때에는 얼마든지 그래 맞다. 나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큰소리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능력을 행하시고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는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자랑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의 제자라는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의 제자가 맞는다는 말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부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번째 부인할 때는 저주까지 하면서 나는 너희의 말하는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14:71)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72절을 보면 닭이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14:72)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잊고 있었고  자신이 예수님께  말도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마음이 집중되었을 뿐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예수님께 직접 들었다 해도 사람은 자신의 위기 상황에서는 오직 자신이 사고자 하는 생각 밖에는 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성경을 많이 알고,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고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살아갈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복음을 알고 예수님의 뜻을 안다고 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뜻을 생각하고  뜻대로 행동할  있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착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처럼 행동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위기 상황을 만난 베드로가 자신이 장담한 것도 잊고 자신의 처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의 뜻보다는  유익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도저히 신자   없는 우리를 신자 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도저히 진리의 길을   없는 우리를 붙들어서 진리의 길로 밀어 넣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평탄한 삶만 원하지만 하나님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힘들게 하시고, 때로는 조금 나아진 삶을 살게도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이왕이면 근심 걱정 없는 편안한 삶을 계속해서 살게 하시면서 예수님을 믿게  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삶을 흔드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만약에 우리에게 편안한 삶이 주어진다면 예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갈  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 아무 근심걱정이 없으니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에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장담하건데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삶이 편하면 자신의 편한 삶에 취하게 됩니다. 근심 걱정이 없는 풍족한 삶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남은 것은  삶을 즐기는 것밖에 없습니다. 근심 걱정이 없이 풍족하게 사는데 예수님에 대해 갈급해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편하면 편한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항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때로는 편하게도 하시고, 때로는 힘들게도 하시면서 우리 마음을 예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했었고,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을 했고, 변화 산에서의 놀라운 광경을 체험까지 했습니다. 우리 생각대로라면 그런 베드로는 세상 누구보다 예수님만 철저하게 믿고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강력한 신앙을 증거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자기 목숨을 위해서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인간은 자기 육신에 매어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우리들의 모습이고  모든 인간은 이러한 베드로의 나약함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울음소리

그러면 예수님은 제자인 베드로를  이런 상황으로 밀어 넣으셨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으면서도 굳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상황을 베드로로 하여금 겪게 하시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상황을 겪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장담이나 결심 등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베드로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얼마든지 자신이 실천하면서 신앙생활을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는 장차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함께 한다는 의미를 결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는 상황으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예수님을 부인하는 상황에 밀어 넣으심으로써 베드로에게 남기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울음소리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14:30) 말씀이 베드로에게 현실이 되어 평생 남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번째 울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아마도 대성통곡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울음소리는 ‘베드로 너는 자기   살기 위해서 예수님 부인한 인간 밖에 안된다 것을 외치는 소리로 남게 됩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울음소리가 베드로를 주를 부인하는 인간 밖에  된다는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베드로가 이름 그대로 반석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되어진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베드로가 주를 위해 죽는 길도 마다하지 않고 가게 된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실력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함께 하신 예수님이 이루신 일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울음소리로 인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잊지 않고 말씀의 노선에 참여된 자로 살아갈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거나 주의 일을 한다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전에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역시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를 부인하고 배신하면서 내가 사는 길로만 달려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외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베드로의  울음소리가 되어서 우리에게 들려져야만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역시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았던 인간 밖에  되는구나라는 사실을 절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울음,  베드로와 같은 애통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예수님의 함께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는  힘으로 사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것도 예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산다는 것을 매일 매일 자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실체를 잊지 않게 하는  울음소리로 들려질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거룩한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우리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언제나 주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우리의 어두움을 드러내는  되신 말씀이기를 바라며  그렇게 우리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뜻대로 인도하며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열심에 감사와 찬양의 삶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이 자기가 결단한대로 행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우리가 잊지 않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실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제사장의 여종의 질문에 베드로가 자신 있게 답을 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이  호언장담을 잊고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삶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예수님이 제자인 베드로에게 이러한 상황을 겪게 하시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가 됩니까?

9. 오늘날 우리게 들려지는  울음소리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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