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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버림 받으신 예수님

본문 / 막15:33-37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막15:33-37)

 

1. 십자가의 현실

우리는 십자가를 말할 때 대부분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만을 생각하게 되지만, 예수님의 고난에만 중점을 두게 되면 십자가는 감상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으로 자신이 십자가를 믿고 있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을 하자면 ‘감상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신자를 감상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가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사람들이 외면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길이기에 진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신자, 즉 ‘왜 나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가?’를 깨달은 신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돈으로 편히 사는 현실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난과 조롱의 현장인 십자가의 길을 소망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돈으로 사는 현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며 죽어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설령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더라도 굳이 고통을 겪으며 죽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십자가 말고 아무런 고통이 없이 편히 죽으시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실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꼭 그러한 고통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선명하게 살아날 수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더 심한 고통을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 동안 받게 하셨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용서는 더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고 고통을 받으며 죽으실 때까지의 시간은 빌라도가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라고 이상히 여길 정도로 짧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통상적으로 십자가의 사형을 받은 죄수들보다는 빠른 시간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보면 십자가의 의미는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우리는 십자가 하면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생각하면서 자기 육신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예수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그 어떤 고통을 몸소 체험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고난에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생각과는 좀 다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2. 배척과 버림받음

지난주 말씀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드러난 것은 인간의 무지와 완악함임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장면은 인간은 결단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불의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무지에서 깨어나게 하고 무엇보다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함으로써 예수님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절함으로써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분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세상의 상태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 보면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막15:33)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육시는 우리 시간으로 열두시이며 구시는 세시를 말합니다. 이처럼 온 땅에 임한 어둠의 상태는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었던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배척한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을 거절한 세상은 어둠일 뿐이며 그것이 곧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고 배척한 이스라엘을 심판받은 애굽과 동일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겼다고 자부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한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어둠이며 또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도 이런 이스라엘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그 길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무엇이 저주이고 생명인가를 모른 채 오직 자기 생각에 맞으면 그것이 진리라 여기면서 어리석은 자의 길로만 가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전혀 다른 믿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국 세상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외면하고 배척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소리치시고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외침은 자신이 버림받는 이유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써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뜻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곧 영원한 저주 아래 있게 됨을 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고 예수님은 그 고통을 외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형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외침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죄인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버리시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철저히 침묵하심으로써 죄가 가져오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죄로 인한 관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버림받음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버림받음에 대한 아픔과 고통이 없습니다. 아예 나는 버림받음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이라는 것만 생각할 뿐이지, 버림받은 존재일 뿐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백성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 또한 제대로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고통을 느끼며 살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고침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주의 십자가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음에도 무감각한 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예수님을 보내사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배척 받고, 하나님께 버림받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버림받고 저주 받은 길을 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관계가 화목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버림받아 마땅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공로를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고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으로 인해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의 것을 복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높이고자 한다면 그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과 버림받음의 고통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이 없이 사는 것을 더 큰 고통으로 여긴다면 결코 십자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세계 밖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감상하는 것이 전부일 뿐 자신은 여전히 세상의 사고방식에 동조하면서 세상과 같은 길을 갈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의 길을 가심으로써 저주에서 해방되고 구원의 복을 누리며 또 세상의 것을 상속받을 자가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 받을 자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만을 높이고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공로 앞에 나의 공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에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없게 됩니다. 다만 진리를 따라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여 영원한 영광에 함께 참여되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알게 된 신자의 믿음인 것입니다.

 

3. 침묵의 하나님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아들이 고통을 당하며 죽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하나님 앞에서 조금만 힘들어도 살려달라고 소리칩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버리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 보다는 내가 당하는 어려움이 더 크고 중요한 문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따져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비록 십자가에서 죽으시지만 하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마10:32-34)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외침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인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부터 예수님께는 이미 고난의 시작인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시면서 피조물로부터 배척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모와 함께 고통을 받으시는 것도 낮아지시는 고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외침은 더 이상 낮아질 데가 없는 밑바닥까지의 낮아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낮아진 자리, 즉 버림 받으신 예수님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생명은 하나님이 없다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나의 모든 문제에 오셔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로 평탄한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하나님은 내가 힘들고 어려운데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 침묵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낮아지고 또 낮아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마치 하나님이 날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처럼 낮아지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부활의 생명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외치시고 죽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부활의 생명이라는 관계 가운데 계셨습니다. 즉 육신은 버림을 받으시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 관계에 계셨던 것을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고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힘든 사건과 사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 눈물로 애원하고 부르짖는데도 정작 하나님은 침묵해 버리실 때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이 오히려 사랑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절망과 낙심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버림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현재의 고난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하시는 분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으로서 영원한 이 고통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부활 생명이 얼마나 크고 아름답고 놀라운 은혜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눈앞의 문제 해결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하게 하는 그 믿음에 있게 하기 위해 자기 백성에게 얼마든지 침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외침과 하나님의 침묵에서 바로 그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림 받음의 자리로 밀어 넣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주어진 형편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오히려 버림받았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원망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낮아지는 것을 견디지를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원망과 죄뿐입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은 버림 받으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낮아짐이 오히려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은 부활의 생명이 되신 예수님 밖에 없음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도 신자인 우리에게 이 사랑에 감사하는 믿음과 찬양만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고난만 생각하게 될 때 주의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을 조롱함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세상의 모습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5.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6. 예수님의 외침과는 달리 오늘날 주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우리들이 생각하는 다른 믿음은 무엇이며, 신자의 참 믿음은 무엇라고 합니까?

8. 예수님의 외침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며 또 그것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9.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까닭과 또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10.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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