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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지 않는 자를 만나 주시는 예수님

본문 / 16:9-14

1. 믿지 않는 자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일을 사실로 증거 한다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서 무덤에서 나왔다고 해도 사람이 다시 살았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기에 오히려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앞설 것입니다. 그런 까닭은 우리에게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상식이 앞서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처럼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증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과 같이 믿지 않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아예 죽은 자로 간주하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세상의 상식에 갇히고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부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이미 다시 사실 것에 대해 미리 말씀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10:33-34)고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말씀에 의해서 다시 사신다는 것은 이미 예정된 사건이었고, 그 예정된 사건이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조차 없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뜻과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난데없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다는 말씀은 다른 목적을 가진 제자들에게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2. 제자들의 3년의 의미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오늘 본문의 제자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런 제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면 내가 제자라면 죽었다가 다시 사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부활을 믿었을 것이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애당초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안다면 제자들의 믿지 않음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면 그 시각은 자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야만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3년의 세월도 제자들의 믿음에는 보탬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쳐버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많은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지만, 결국 믿음에 있어서 실패한 것이 제자들의 전부라면 우리도 결코 제자들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즉 우리가 수십 년을 교회를 다니며 설교를 듣고 또 어떤 놀라운 체험을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한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세상에 집착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는 일에 몰두한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은혜로 짓누르면서 인생의 헛됨을 보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는 나를 위해서만 살려고 발버둥 쳤을 뿐이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참견하시고 간섭하시며 영생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를 다닌 수십 년의 세월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수십 년의 세월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우리가 교회를 다닐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3년 세월도 허송세월인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제자들이 그럴 것이라는 것에 대해 모르셨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 할 것도,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제자들을 부르셔서 3년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해 모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인간의 상식과 시각으로는 실패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도망친 것도 부족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거도 믿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을 예수님의 실패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3년 동안의 제자교육이 실패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괜한 수고를 하신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실패와 믿음 없음을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즉 제자들의 믿음의 바탕에 인간적인 요소는 모두 삭제가 된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이기에 성령이 오신 뒤에 자신들에게서 어떠한 열매가 맺힌다고 해도 제자들은 그 열매를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으로 맺은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오직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의 3년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가 교회를 몇 년을 다녔든 우리 자신에게서 보이는 것은 세상을 향한 집착뿐인 것입니다. 자식에게 집착하고, 돈에 집착하고, 성공에 집착을 하는 우리의 삶의 여정에 오직 욕망의 흔적만 잔뜩 발산하며 살아온 세월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어서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에게서 바로 그러한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항상 믿음에 실패하는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자신에게서도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내가 했다거나 소위 하면 된다고 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 즉 사단의 사고방식을 믿음이라고 고집하는 어리석음에서는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나오게 하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주를 만난 자들

늘 본문 14절을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16:14)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상봉을 했다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마도 기쁨일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히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줄로만 알고 낙심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다시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와 다시 만난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기쁨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음이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기 전까지 믿음이 없고 완악한 자로 드러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그들이 무엇을 하든 또 그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되든 그 모든 것이 제자들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3년의 세월에서 배운 것이라면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은 무익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 앞에 나오면 나올수록,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면 다가올수록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과 우리 마음의 완악함 뿐인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믿음에 관한한은 감히 인간이 개입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할 수 있다'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주지 않으셨다면, 제자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냥 뜻을 품고 세상에 오셨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어 버린 스승에 불과할 뿐이고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한 힘과 소망도 제자들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열심과 자신의 정성으로 예수님을 자신을 도우시는 분으로 오게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살아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교회를 몇 년을 다녔든 허송세월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괜히 다닌 것이고, 괜히 시간 들이고 정성 들이고 힘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닐수록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믿음 없음과 완악함 뿐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았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허송세월이 아니었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우리들의 흔한 생각처럼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알려주고 확인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꾸짖음이 오늘 우리를 향한 꾸짖음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십자가에 죽으시고 말씀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그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으십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런데 그 주님 앞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서 있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서의 부와 명예와 성공입니까? 그러면 지금까지의 교회에서의 생활은 헛된 시간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활하사 우리는 만나시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이 없고 또 마음이 완악함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그 예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기에 바빠야 하는 곳입니다.

오직 우리의 고백은 내 믿음은 없습니다. 있다면 예수님의 믿음만이 있을 뿐입니다.’라는 고백과 노래만 있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를 영생으로 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전부라고 고백되어지는 자리가 바로 교회임을 알아 오늘도 부활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실체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복된 인생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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