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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돼지 떼에 들어간 군대 귀신

본문 / 5: 9-20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5:9-20)

 

1. 인간의 실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여섯 째날 에덴에 아담을 창조하시고 한 가지 언약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6-17)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언약인 것은 호세아서 6장에 보면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6:7)라고 말씀하심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이 한 가지 언약을 지켜내지 못하고 마귀의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는 유혹에 빠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 먹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선악과를 에덴의 중앙에 두신 것은, 인간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거나 이룰 수 없음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을 때부터 인간은 이미 사탄에게 장악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로 그 어떤 인간도 사탄에게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 존재하게 된 피조물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또한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순종해야 하는 본분도 잊어버린 채 오직 자신이 자기의 왕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것이야 말로 사탄에게 장악되어 살고 있는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또 무엇을 힘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직 자기를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또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들이 과연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결코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아닙니다. 사탄에게 장악된 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고 오직 육체로만 존재하는 멸망의 자식들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들의 눈에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 또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정상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창조이신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여전히 사탄에게 장악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실체인 것입니다.

 

2. 본문 내용

오늘 본문에 보면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가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어 몰사하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나옵니다. 일단 이 내용을 문자 그대로 귀신이 역사하는 현상으로만 봐야 한다면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 나타나야만 마땅할 것입니다. 귀신은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의 모습처럼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가 모두 죽는 일을 보고 들은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이 나타난 현상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오늘날도 그때와 똑같은 현상으로 귀신이 역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난주에도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정신적으로 멀쩡한 사람들은 귀신들리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5: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이에 귀신은 군대라고 답합니다. 군대라고 말하는 것은, 귀신의 이름이 군대라는 뜻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로 그렇게 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라고 답한 후에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가하면 바다에서 죽은 돼지가 거의 이천 마리라고 한 것을 보면 귀신의 수도 거의 이천이 된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귀신들린 사람을 장악하고 있던 귀신의 수가 거의 이천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단지 귀신의 숫자가 많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고 이길 수도 없는 형편이 귀신들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0절부터 보면 이 귀신이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5:10-12)라고 합니다. 귀신이 예수님께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며, 돼지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들을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간 후 돼지 떼가 바다로 들어가 몰사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애매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은 바다에 빠져 죽은 돼지 떼의 주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그들의 재산인 돼지를 모두 잃어버리는 일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예수님에게 자기들에게서 떠나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살펴봐야 할 내용입니다.

 

3. 귀신의 활동과 우리의 신앙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는 이유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돼지 주인들이 애매하게 자신들의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는 일을 겪게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귀신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귀신이 역사하고 있는 세상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반응과 또한 귀신이 세상을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돼지 떼의 주인들은 돼지를 기르면서 나름대로 소망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보다 더 많은 돼지를 소유하여 이 세상에서의 더 많은 부를 누리고자 하는 계획과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일순간에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재산상에 큰 손해를 입게 된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을 깨끗케 하시고, 파도와 바람을 잠잠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능력의 주가 되신다고 해도 거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소유에 대하여 큰 손실이 있게 하는 예수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신에게 장악되어 있는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에 있습니까? 아니면 생존에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생존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의 생존을 돕는 신을 신다운 신으로 여길 뿐입니다. 따라서 소유에 큰 손실을 가져다주는 예수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는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으로 인해서 뭔가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아예 포기하고 예수님만을 전심으로 구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기 때문에 전혀 예수님이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길과는 반대로 아니 아예 예수님의 길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복 주시는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혀 불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는 함께 할수록 복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있던 문제도 해결되게 해주는 예수인데 그런 예수를 불편해하고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예수는 불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가는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분명 세상에서 버림 받는 길로 가신 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길로 가신 분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길로 가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시고, 온갖 고난과 멸시를 다 받으시면서 온 세상이 침 뱉고 조롱하는 길을 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추구한다면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이 불편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 역시 예수님과 같은 그 길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해도 불편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좁은 길로 이끌어 가시고, 주님과 함께 고난과 멸시 받는 길로 가게 하시는 예수님이라고 해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라사인들이 예수님을 쫓아내는 일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만합니다. 혹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의 육신의 삶에, 즉 생존의 문제에 어떤 손실을 주신다고 해도 그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그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자일 것입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고자 한 것은, 재산의 손실을 가져오게 함으로써 거라사인들과 예수님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귀신의 활동입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야 세상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가를 잘 압니다. 그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에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에 붙들릴 때 십자가를 말하는 예수는 자연히 싫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넒은 길보다는 좁은 길을 말하는 예수를 배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복을 선포하고, 넓은 길로 인도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예수를 자신의 주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는 이미 예수가 아닙니다. 우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에 붙들려 있는 것이야 말로 사탄에게 완전히 장악된 상태인 것이고, 이것이 곧 귀신 들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적인 사람은 없다는 것이 정답인 것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만약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돼지 떼가 두 배로 늘었다든지 했다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을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계속 자신들과 함께 있어달라고 애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한 소유의 확장이 더 좋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분명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갑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기대할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오직 우리의 생명을 위해 세상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생명과 함께 생존의 문제까지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존의 문제를 버리고 생명의 문제만을 안고 나올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소유를 치시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래도 네가 나를 원하느냐?는 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신자 되었다고 해서 행실이 불신자보다 더 거룩해지거나 더 많은 선행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죽은 자인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신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러한 신자에게 주님의 음성은 아주 확실하게 들리기 마련입니다. 또한 목자의 음성도 분별하게 됩니다. 세상의 어떤 현실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지 않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그 은혜만을 노래합니다. 우리의 그 자랑과 찬송이 영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이 주신 첫 번째 언약은 무엇이며, 그 언약을 주신 의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사탄에게 장악되어 있는 증상은 어떻게 드러난다고 합니까?

3. 오늘 본문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예수님의 물음에 귀신이 자신을 군대라고 하는 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이 귀신들의 원대로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신 의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본문에 돼지 치는 자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7. 예수님이 우리에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땅에서의 귀신의 활동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주의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가지는 우리의 착각과 또 그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 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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