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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제자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뜻

본문 / 6: 7-13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6:7-13)

 

 

1. 보냄 받은 목적에 대하여

우리는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대부분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생각을 잠시 접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일단 우리들의 생각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그 보냄을 받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도 알지 못하면서 복음을 전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전혀 몰랐습니다. 그 당시의 제자들이 본 것은 기껏해야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능력이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해봐야 복음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빠지고 대신 자신들이 보고 경험한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제자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제대로 증거 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 성령이 임하셨을 때부터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들의 생각처럼 복음전파, 즉 전도의 사명을 맡기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다른 뜻이 주어져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 때 세상에 보냄 받은 제자들의 존재 이유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셔서 보내십니다. 이 말은 세상에 보냄 받은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필요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필요했을까요?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권능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 믿게 하겠다는 것이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예수님의 의도시라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바다 위도 걷고, 풍랑도 잠잠하게 하는 권세까지 주시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비해 초자연적인 역사는 더 큰 권능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의도라면 그럴게 하시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기적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는 능력이 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예 신비한 능력과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좇았던 사람들을 거부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좇았으나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 )라고 책망하신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즉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고 심지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귀신을 더러운 존재라고 말합니다. 귀신이 더럽다는 것은 외모를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귀신의 더러움은 귀신이 추구하는 사고방식과 그 속성에 대한 판단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 마음은 이미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이미 사단에게 장악된 인간의 현실이었고, 그 현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것입니다. 결국 더러움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욕망으로 인해 지금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온갖 더러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상을 더럽다고 하는 것도 우상은 자신을 위해 찾는 자신을 위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나누었던 마가복음 5장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에게 자신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허락을 했을 때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는 모두 바다로 뛰어 들어 몰살당하고 맙니다. 그러자 졸지에 많은 돼지 떼를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그런 요구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면 자신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더러운 것입니다. 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세상에 보냄 받은 제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하는 가를 보여주는 곳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세상을 쫓겨나야 할 더러운 세상과 거룩하신 예수님께 속한 세상으로 나누십니다. 즉 예수님은 귀신들림이라는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세상에 대한 심판을 보여주시는 의미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 본문에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할 일이 예수님이 하신 일과 무관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향해 세상의 더러움을 나타내시고, 더러운 세상은 결국 쫓겨나야할 곳임을 증거 하신 그 일이 제자들에게 주어졌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세상은 쫓겨날 것임을 증거 하려면 제자들은 거룩에 속한 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러운 세상이 어떤 것임이 증거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보냄 받은 자의 사명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부터 보면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6:8-9)고 하십니다. 원래 여행을 떠나라면 준비할 것도 많고 가져갈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합니다. 여행을 위해 지팡이 하나만 허락하실 뿐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신발과 옷 한 벌만 입은 채로 떠나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행을 하면서 지팡이 외에는 가진 것이 없고,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 않은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예수님과 일치된 길을 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치된 길에 서서 그 길에 순종함으로써 세상을 향해 더러움이 무엇이며, 더러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 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세상은 오직 소유를 위해 살아갑니다. 소유를 증진시키는 것이 삶의 방향이고 목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도 자신의 소유 증진을 위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귀신에게 장악된 더러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거룩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유 증진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땅의 것은 흩어 버리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제자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길에 순종해야 할 사람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걷는 신자는 자신의 소유 증진이 삶의 방향도 목표도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 않음으로 소유를 위해 살아가는 더러운 세상과는 구별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다고 드러내고 증거할 수 있는 거룩에 속한 자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가 제자이며 신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 우리가 서서 가는 길은 예수님이 가신 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가고 있는 길에 우리도 함께 서서 가고 있는 현실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6:1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의 관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행을 하면서 불가피하게 이방인의 지역을 통과했을 때, 다시 유대 땅에 들어가기 전 경계에 서서 옷과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것은 모두 부정하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제자를 영접하지 않고 그 말을 듣지도 않거든 발아래 먼지를 떨어냄으로써 그들을 이방인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에 서 있는 제자를 영접하지 않은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지금 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그 형편이 어떻든 분명한 것은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야 할 더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곳 안에서 부자가 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함께 더러운 자로 취급받고 쫓겨나야 할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보냄 받은 신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가 가는 길은 예수님이 가셨던 길이어야만 합니다. 사도들이 갔던 길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간 그 길에서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소유 증진을 위해 살았던 삶이 있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삶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을 뿐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길에 일치된 자로 살아가야 할 존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본문의 내용이 흔히 말하는 무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소유가 곧 복음이고 진리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위치에 따라 소득이 발생하고 또 그로 인한 소유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달라야 하는 것은 소유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기쁨을 소유에서 찾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가는 길일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정신은 한결 같이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그 마음이 하늘의 영원한 것을 향해 있는 존재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신자에게는 덜 가지고 더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유가 우리의 마지막을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에서 세상과 구별된 자로 드러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 된 자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결국 더러운 세상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피로 정결한 자 되었으니 그 본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제자들을 둘씩 보내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그에 대한 의문은 무엇입니까?

2.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신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의문은 무엇입니까?

3. 성경에서 귀신을 더럽다고 표현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나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이 더럽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5. 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심과 제자들에게 그러한 권세를 주심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세상이 더러운 귀신으로 말미암아 장악 되어 있는 모습은 어떻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8. 제자들에게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 나갈 때 발아래 먼지까지도 떨어내라고 하는 까닭은 무 엇입니까?

9. 신자가 부름 받은 목적과 그 삶은 어떠해야 한다고 합니까?

10.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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