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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승천과 그 일의 증인들

본문 / 24:50-53



1. 하늘로 가심

누가복음의 마지막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으로 장식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 아마도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하늘로 가셨는지, 하늘로 가셨으면 하늘 어디로 가셨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가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1)고 했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로 가신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구름을 타고 가셨으니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가셨든 또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든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적 해석으로 인해서 성경이 품고 있는 깊은 의미와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재림은 어느 한 공간과 장소에 국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재림을 하신다는 것입니까? 이단의 경우에는 재림의 장소가 한국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 이미 예수님이 재림하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재림주가 바로 자신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모두 이단이며 사이비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이비에 속는 것은 승천과 재림의 사건을 신비적인 기대와 호기심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재림하신 사건답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조용하고 밋밋한 것보다는 신비한 현상을 동반해야 성령의 역사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아주 간단하게 하늘로 올려지시니”(24:51 )라는 한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가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도 우리가 호기심을 둘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흔히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적인 현상이나 사건에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사건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적인 현상을 동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치우치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려고 하는 사건의 본질을 망각한 인간의 쓸데없는 호기심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2. 익숙한 천국

예수님의 승천에서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늘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려 지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은 과연 단순히 공중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우주의 공간 어딘가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장소적인 곳이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세상 누구도 성경이 말하는 하늘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늘 자체가 신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하늘을 이 땅에서의 경험과 지식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늘을 자신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과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세상이 생각하는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생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천당은 일종의 보상의 의미로 굳어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잘 한 사람에게 그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의 의미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천당에서 받는 상에 차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세상에서는 고생하며 살았으니 천당에서는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산다는 의미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당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있습니다. 설사 천당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천당이 있다면 그런 곳일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며 착하게 산 것에 대한 보상으로 가는 천당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하늘로 가셨다는 것이 이러한 천당, 즉 하늘나라로 들어가셨다는 뜻인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하늘나라를 그러한 곳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곳은 단지 인간의 보상심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상상의 장소일 뿐입니다. 이처럼 천당을 뭔가 자기에게 익숙한 곳으로 상상하고 만들어 내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도 역시 자신에게 익숙한 신으로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착각이고 신앙의 길이 왜곡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자신에게 익숙한 분으로 일치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정성을 바쳐 기도하면 들어 주시는 하나님’‘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복 주시는 하나님’‘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성경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하나님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내가 사용하는 것처럼 여기고 사용자 중심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된 하나님으로 가득한 것이 지금의 기독교의 실상이기 때문에 신앙 또한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뭔가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잘 알고 있는 내용인 것처럼 평범한 내용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아주 낯설다는 느낌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늘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하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하늘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전혀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내 취향에 맞는 하늘과 일치시켜 오늘 본문의 하늘을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내게 익숙한 것을 찾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교회는 큰 예배당에 무대와 같은 강단이 있고, 강대상과 긴 의자 있으며, 예배시간에는 성가대가 멋있는 노래를 부르고, 예배를 마친 후에도 여러 부서들의 행사로 가득한 모습일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청년들이 앞에 도열하여 드럼을 치고 건반을 두드리며 노래를 인도하고, 두 손을 들고 주여를 부르며, 구제와 선교에도 힘을 쓰고 교인들은 서로에게 웃으며 친절한 그런 교회일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교회에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설사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런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 모두는 우리가 속한 예원교회 나름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교회로 모여도 낯선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게 익숙한 하나님, 내게 익숙한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봐도 하나님이 낯설지 않고, 교회로 모여도 교회에서 낯설고 기이한 것을 전혀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문제시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도 하늘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교회 역시 이 세상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속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원교회 성도님들은 저의 설교에 익숙해지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 한 사람으로부터 설교를 들으셨기 때문에 저를 통해 주시는 설교에 익숙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저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에서 낯선 것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분명 우리들에게 낯선 세계로 다가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례히 하는 익숙한 말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낯선 세계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이러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에게 교회는 예배드리고 설교 한편 듣고 흩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전부인 곳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하늘의 의미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하늘로 가셨다는 것은 우리가 가야할 세계로 예수님이 앞서 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이며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 낯설고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신 그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하늘을 우리들에게 익숙한 하늘의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 먼 곳으로 가셨다는 의미로 인식될 뿐인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역시 세상과는 멀리 떨어진 곳,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늘에 계시며 그곳에서 우리를 살피시고 도우시는 것으로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익숙한 하늘이고 또 익숙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의 하늘은 종말론적인 생명이 감추어져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해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사실 저도 설교를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늘을 사실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서 깨달은 하늘의 의미를 성도님들께 설명 드리는 것뿐입니다. 하늘이 무엇인가는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즉 예수님의 재림으로 감추어진 생명이 드러났을 때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확실하지 않게 희미하게 보면서 온전히 볼 수 있는 그 날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단절된 세상으로부터 떠나 생명의 세계인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속한 자로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신자 역시 세상에서 떠나야 할 존재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를 나그네로 일컫는 것입니다. 신자가 생명에 속한 자로 존재한다면 신자는 이미 하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늘을 사는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늘을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늘로 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영광의 하늘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는 재림의 사건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에 속한 자로 하늘을 사는 신자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선물로 주어질 영광의 하나님 나라가 자신이 영원히 거할 본향임을 믿고 그 나라를 소망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세상에서의 모든 고난을 인내하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가 세상에서 물질적인 복을 받고 그 이름이 높아지고 영광을 누리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에 그러한 복의 의미는 전혀 약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을 주는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에게 익숙한 신앙, 자신에게 익숙한 예수, 자신에게 익숙한 하나님을 참된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4. 찬송에서 찬송으로

오늘 본문 52절부터 보면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24:52-53)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서 찬송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예전의 사도들이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을 만류했던 사도들이었다면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 것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인데, 그런 예수님이 다시 활동을 하신다면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것으로 세상에는 제자들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죽으신 분이 아니라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신 생명으로 하늘에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으로 알았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한 것처럼 교회 또한 예수님의 승천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항상 예수님으로 인해 성취된 참된 생명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셔서 하늘로 가셨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참된 생명이 하늘이라면 예수님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감추어진 생명의 세계로부터 오셔서 생명의 세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생명을 위해 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때문에 신자는 신앙의 세계와 함께 자신의 모든 삶을 생명이라는 문제로 연결하여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세상의 것으로 인생을 이해하려고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것은 보지 못한 채 보이는 것에 붙들려서 세상과 동일하게 무거운 삶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명을 바라보고 소망한다고 해도 삶의 무거움을 완전히 벗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삶의 문제로 인해 근심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예수를 모르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에 속하고 하늘을 사는 신자라면 그러한 삶에 붙들리고 매몰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자각하며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이 가신 하늘, 즉 생명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나라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졌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누가복음은 그 시작인 1장에서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1:1-4)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목격자의 증언입니다. 데오빌로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로 성취된 생명의 문제를 확실하게 증거 하는 것이 누가복음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모든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우리 또한 사도와 같은 목격자입니다. 따라서 목격한 바를 증언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사명임을 알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항상 그 증인을 삶을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그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예수님이 가신 하늘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인간 자신에게 익숙한 하나님이란 무엇을 말씀합니까?

4. 기독교 신앙에서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과 그 예는 무엇입니까?

5. 우리가 매주 듣는 설교에 익숙해 질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6. 예수님이 가신 하늘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릅니까?

7.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예전의 제자들의 모습과 지금의 제자들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8. 생명의 세계인 하늘의 삶을 사는 신자들의 삶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9. 주를 믿는 신자들의 남은 사명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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