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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본문 / 1: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

 

 

1. 마가의 복음

오늘부터 성도님들과 함께 마가복음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가복음에 대하여 자세히 나누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마가복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을 비롯한 모든 복음서들이 동일한 예수님을 증거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예수님의 고난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도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고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곧 죽음을 이기신 최후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나눌 이 마가복음이 바로 그러한 승리하신 예수님에게 초점을 두고 증거하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즉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예수님의 고난보다는 승리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도, 복음의 시작이신 그리스도는 죽음도 이기신 분임을 증거 함으로써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가복음에 유난히 이적이 많이 기록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적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결국 죽음까지 이기심으로써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승리자가 알파와 오메가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 마가의 복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가복음은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서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마가복음은 그 마지막을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16:17-20)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뱀을 집고 독을 마신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 이적이 따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죽음도 이기는 승리의 기쁜 소식임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은 승리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가가 증거 하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승리의 기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복음의 시작

다시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는 말로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디모데 후서 2장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2:16)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즉 하나님의 시각으로 기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사사로운 뜻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 역시 인간적인 사사로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이 복음의 시작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이신 복음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고 또 내가 중심이 된 자의 세계가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이 되신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세계를 근거로 해서 우리의 눈에 비춰지고 있는 오늘날의 실상의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진리의 길에 서 있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이 되시는 세계는 승리의 기쁨이 있는 세계로 증거 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의 승리 또한 맛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자에게 가장 복된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중심이 된 세상은 이것을 복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눈에 보이는 육신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일이 잘되었을 때에만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과 뜻대로 쓰여진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17-24)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행함, 즉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아가는 것을 허망한 마음에 의한 것으로 말합니다. 허망의 사전적 뜻은 기대와 달리 보람이 없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헛된 것을 믿는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헛된 것, 다시 말해서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을 좇는 것이 이방인의 삶이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것은 허망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나름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선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생명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다면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듣는다고 해도 결국 사망에 갇힌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허망한 행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 삶 자체가 허망한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관계에서 그리스도로부터 하늘의 신령한 복을 공급받습니다. 세상에서의 높고 낮음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신령한 복은 세상에서의 신분이나 위치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자녀 되게 하신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도가 함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누리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신자는 한번 살면 끝나는 인생인데 보란 듯이 떵떵거리고 잘 살아보자는 세상의 방식과는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삶의 방식이 허망한 것임을 보여주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이러한 신자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신다면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옛 습관이 항상 유혹의 욕심을 따르게 하고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길로 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로 사는 것이 자신을 바탕에 방임하는 것이고 이방인과 똑같이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삶의 방향도 목표도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세워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영광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이 이방인의 허망한 삶과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목표 또한 세상이 아니기에 같을 수가 없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의지하고 힘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이방인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신자는 세상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에 맺어지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3. 오직 은혜

오늘 우리는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시작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들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마가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모든 마음을 두고 있는 것처럼, 마가의 증거를 통해서 승리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그 승리에 함께 함으로서 세상이 알 수 없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만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기존의 마음 그대로 나온 것이라면 이 말씀들은 우리들에게서 단지 마가복음이라는 성경의 일부로 간주될 뿐입니다. 물론 마가가 증거하고 싶어 하는 승리의 기쁨 또한 멀어질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신자가 성경을 대할 때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누렸던 평안과 기쁨과 찬송과 은혜 안에 함께 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어떤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러한 기쁨과 평안과 찬송과 은혜에 있을 수가 있는가를 알아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내 속에 있는 다른 관심이 예수님과의 사이에 벽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 벽이 무너지기를 소원하고 애통해 하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오심이 왜 복음이며 기쁨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오심이 오늘도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진심으로 복음의 소식이며 기쁨입니까? 예수님의 오심이 복음의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은 모두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한계를 모두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예수님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영원한 죽음으로 몰고 가야 했는데, 그것을 모두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그것을 아는 자들이 담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 즉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상을 주기 위함도 아니고 복을 주기 위함도 아니라 오직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보통 법이라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범죄를 더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죄를 조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율법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결국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법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 숨어져 있는 죄의 모습을 끌어낸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죽는 이유를 몰랐는데, 율법이 주어짐으로 해서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의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도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에게 넘친다는 뜻입니다. 결국 자신의 죄를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은혜는 진정한 은혜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는 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에서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일한 대로 받는 삯입니다. 그래서 나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자신의 죄를 알아야만 합니다. 자기 죄를 알고 자기 의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할 때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리우고 우리를 의로 여기시고 천국가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분명히 율법은 실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더하게 하셔서 자신의 의에 대해서 포기하게 하시고 은혜가 넘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율법을 들이 대고 실천을 요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결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담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를 향한 거룩한 뜻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한 채 살아가는 인간의 종착역은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기쁨의 시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다만 성인으로 기억될 뿐이지만 신자에게는 복음의 시작이 되시는 분입니다. 기쁨의 시작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기쁨을 세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기쁨은 세상에서 얻고 싶어 할 뿐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이 크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직까지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죄를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결과입니다. 죄를 알지 못하기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쁨을 얻게 해주는 예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그런 예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예수일 뿐입니다.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비록 세상이 볼 때는 어리석고 실패한 것 같은 인생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소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자신을 예수님을 좇았던 사도들처럼 예수님이 가신 길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런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복된 자인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그 복이 우리의 마음에 크게 보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가 이 복음서를 통하여 알려 주려고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어떻게 보아야만 한다고 하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우리가 말하는 세상의 복이라는 것을 성경은 무엇이라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 가운데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 문제는 어떤 영향을 준다고 합니까?

6. 신자가 성경을 대할 때 있어야 하는 마음은 무엇이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일반적인 법에 대한 상식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율법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8.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예수님만이 기쁨인 자들과 예수님으로 세상의 기쁨을 찾고자 하는 자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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