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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본문 / 1: 9-13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9-13)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흥밋거리가 되지 않는 이야기이고 또 교양적으로도 별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없는 인간의 삶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삶의 결과는 죄에 갇혀서 영원한 사망으로 끝이 납니다. 신자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이 없는 삶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항상 구원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별 쓸모없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지,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인지를 점검하게 해주는 귀한 말씀으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향한 이런 마음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자의 만남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의 세례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일입니다. 세례는 우리도 잘 알다시피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써 죄를 자복하고 죄 씻음을 받는다는 의미로 행해지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러한 세례를 받으실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시기에 죄인이 받는 이러한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앞으로 어떤 인생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즉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대신하여 죽는 길을 걸어갈 것임을 세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써 죄인인 인간의 죄 값을 예수님이 모두 담당하실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에 대하여 하늘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10)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1)는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당시 요단강에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죄인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죄인의 세례는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을 위한 삶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의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세례 받으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의와 자신의 영광을 포기한 채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착하고 의롭다고 여겨지는 행동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야 말로 나의 인생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늘이 갈라짐

다시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10)라고 하여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닫혀 있던 하늘이 열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닫혀 있던 하늘이 열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줄 아시겠습니까? 하늘이 닫혔다는 것은 땅에서 하늘로 가는 모든 길이 막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하늘과 땅이 단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절은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인간은 영생과 상관없이 비참한 멸망에 처해질 운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드디어 이 땅에 그런 저주의 땅에서 벗어나 복의 세계인 하늘나라로 들어갈 길이 열렸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의 죽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모든 죄인을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아래 있게 하시고, 용서의 은혜로 인해서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실 길이 되실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저주와 어둠의 세상에 새로운 빛의 세계를 창조하실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3. 비둘기 같이 임함

오늘 본문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노아 홍수 사건에서 노아가 물이 말랐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내 보낸 비둘기에서 그 상징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8:6-12)고 합니다. 노아는 사십 일을 지나 지면에서 물이 줄었는지를 알기 위해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보냈는데 까마귀는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을 뿐 방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까마귀의 특성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까마귀는 죽은 동물의 시체를 좋아합니다. 시체가 그들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죽은 시체가 둥둥 떠 있는 방주 밖의 세상은 까마귀에게는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는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를 대신해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냈는데 비둘기는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비둘기는 까마귀처럼 시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에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아직 지면에 물이 있었기 때문에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옵니다. 노아는 다시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 보냈는데 저녁때에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옵니다. 그것으로 노아는 땅에 물이 줄어들었고 식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시작됨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비둘기가 돌아온 것은 아직 지면에 거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방주에서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칠일을 기다려 세 번째 비둘기를 내 보내자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열고 지면에 물리 걷혔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노아는 비둘기를 통해서 심판이 끝나는 땅의 상태를 알게 됩니다. 즉 비둘기가 세상의 상태를 노아에게 알려준 것이 됩니다. 우리가 까마귀인가 비둘기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사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까마귀입니다. 시체로 가득한 죽은 세상에 내 앉을 자리를 찾으며 방주는 아예 잊은 채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를 비둘기 되게 하시고 세상에는 내가 앉을 곳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 방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심판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된 신자는 이런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있을 곳이 없음을 알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안식처로 여기며 주께로 돌아감으로써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욕망을 이루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곳입니까? 그것은 까마귀로 세상을 헤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장차 심판으로 마무리 될 곳입니다. 지금은 굳건한 삶의 터전으로 보이는 것들도 허물어지고 사라질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신자가 앉을 곳이 없습니다. 앉아서 편히 쉴만한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쉼이 있는 안식처라는 것을 안다면 주께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늘 주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으로 신자는 세상이 살만한 곳이 아님을 전하는 비둘기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늘 까마귀로 드러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를 좇는 참된 삶인가를 알면서도 세상에 앉을 자리를 찾으며 세상의 썩은 것을 필요로 하고 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런 자신으로 인해 절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까마귀인 나를 비둘기의 길로 가게 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노아가 밖으로 내 보낸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비둘기가 물고 온 감람나무 잎사귀는 방주 밖에는 홍수 심판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증거 하는 증거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한 것도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존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시작된 새로운 세계를 소망하고 기다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세상으로부터 점차 마음이 멀어지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흔적이며 예수님께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을 말해두는 것이 12절부터의 내용입니다.

 


4. 광야의 예수님

오늘 본문 12절부터 보면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12-13)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광야로 몰아내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들짐승과 함께 계셨습니다. 즉 고달픈 삶을 사신 것입니다. 왜 이런 광야로 예수님을 몰아내신 것입니까? 그것은 누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가는 광야와 예루살렘으로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즉 광야에서 외치는 목자의 소리를 듣고 기존의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예수님에게로 향하는 양이 참된 양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은, 자신들을 기존의 세상에서 굳건한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아, 곧 구원자였습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를 메시아로 인정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는 자신들이 기다리던 영웅적 존재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던 메시아 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전에는 광야에서 외치시는 예수님을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하고 기대하는 예수님 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기대하는 영웅으로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세상에서 우리를 굳건히 세워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저주에 갇힌 우리에게 하늘의 통로로 오신 것이고, 사망에 처한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존귀한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구보다 힘이 되시는 분이고 존귀한 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래서 신자란 예수님을 이처럼 존귀한 분으로 높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를 멸망에서 건질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기에 예수님은 존귀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신자가 할 것은 그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주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 오직 주를 향한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아름다운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세상을 살아가는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까닭과 또 그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성도들의 삶은 어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2.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심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을 기뻐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또 그것을 모를 때의 증상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6. 노아가 홍수 이후에 내 보낸 까마귀와 비둘기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7. 노아의 내 보낸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8. 까마귀 같은 우리에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 모신 까닭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오늘날 주를 믿는 우리에게 무엇 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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