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9,001
오늘 : 114
어제 : 365

페이지뷰

전체 : 78,728,287
오늘 : 406
어제 : 1,14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예수님의 부름 받은 제자의 삶

본문 / 1:16-20

 

1. 하나님 나라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첫 선포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한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 위치하고 있는 어떤 장소적인 의미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기존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로운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가 어떤 세상인가 하는 것은 마가복음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존의 세상은 생존을 위해 살기에 육신의 만족을 가져다 줄 떡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또한 인간의 육신을 위하고 돕는 의미로 해석을 하게 되고,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의 육신을 돕지 않고 배부르게 해주지 않는 하나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이 세상이야 말로 철저하게 악마적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 앞에서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으로만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신뢰하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진정한 생명이요 사는 것임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십자가의 죽음까지 거부하지 않게 하셨고, 그것으로 죽음의 권세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사단에게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승리하시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고 외치심으로써 오직 육신의 생존만을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기존의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온전한 기쁨으로 형성되어 있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소망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또한 소망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이기에 외면당할 수밖에 없고, 새롭고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기존의 인간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등장하였으나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현실에서 예수님의 등장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열쇠가 예수님 한분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는 말씀은 천국이 임하였으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너희의 악함을 깨닫고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는 의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일은 자기 백성을 불러내어서 자신을 따르게 하는 것으로 집중되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의 첫 출발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2. 제자를 부르신 이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장차 예수님을 증거 할 사명을 받은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모든 제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기피한 일은 제자가 있었다고 해도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을 따라 다니며 보고 듣고 배웠으면서도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십자가를 기피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인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일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직접 듣고 보고 배웠다고 해도 그것으로도 자신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적인 본성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인간상을 드러내줄 도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두려워 십자가를 기피했던 제자들은 결국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스스로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개과천선한 결과가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을 장악한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보다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 크고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에 사랑에 이끌려서 복음을 전하는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제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제자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제자들의 새롭게 됨을 보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전부에 녹아져 있는 사랑과 은혜가 느껴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은혜로 마음이 가득함을 누리면서 참된 복의 의미를 새롭게 알고 배우게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천국의 생명의 문제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은 이러한 삶의 길로 이끌어 간 것처럼,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우리 또한 이러한 삶의 길로 이끌어 갈 것임을 굳게 믿으며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 부름 받은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며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3. 모든 것을 버리고

그런데 한 가지 제자들이 부름 받은 일에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부름 받은 제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는 예수님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는 말씀을 따라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역시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우리 역시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이 내용으로 설교하게 되면 그 초점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최우선인 삶을 살라는 것에 두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생업이나 가족보다 더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예수님이 최우선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제는 생업과 가족을 버리거나 등한시 하는 것을 예수님이 최우선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부름 받은 제자들에게는 생업이든 가족이든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생업과 가족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신학교를 가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선교사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 무엇도 아닙니다. 지금 신자가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셨던 그 삶의 길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생업이나 가족보다도 하나님이 더 크신 분으로 다가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의 길을 가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자를 이러한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가시는 길은 기존의 세상이 추구하고 나아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가장 크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온갖 정성과 노력을 보였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고 자기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척은 하였지만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길은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길을 가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바로 이 길에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당시는 예수님이 기적을 보여주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크신 능력을 보고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말에 큰 깨달음을 얻고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름 받은 그들은 생업도 버리고 가족도 뒤로 한 채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이것은 사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그냥 예수님에게 이끌렸다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깨달음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예수님에게 온 마음이 이끌린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라고 하며 손을 비비는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코 신에게 마음이 이끌리지 않습니다. 신이 어떤 분이고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보이지 않는 신이 존재한다고 간주하고 자신의 소원을 내어 놓을 뿐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비나이다라는 수준으로 전락된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다만 효율적인 비나이다에 대해 강연하는 것과 같은 모습만 있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 ‘기도 응답 받는 비결’, ‘100% 응답 받는 기도의 비밀 등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는 기도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가르쳐 주는듯한 설교만 있는 교회가 많이 보인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가장 크신 분으로 다가온 것이고 온 마음을 예수님에게 빼앗김으로써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단지 보통 사람과는 다르고 알 수 없는 크신 분으로만 보였다면, 나중에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온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죽음도 두려워 않는 진리의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생업과 가족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마음이 이끌려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배와 부친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것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길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세상은 생업과 가족을 버리지 못합니다. 즉 생업과 가족을 버리게 할 만한 큰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뜻을 위해 생업이나 가족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포부를 사랑하는 욕망이고 이기심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생업과 가족을 뛰어 넘는 큰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시작된 새로운 삶입니다. 또한 이것이 신자에게 시작된 새로운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업과 가족을 소홀히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보다 생업과 가족을 더 크게 여긴다면 생업과 가족을 위해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 생업을 도와달라고 하고, 내 가족의 안위를 보호해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기존의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은 생업도 가족도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에서, 또는 가족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고 증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4. 신자란 어떤 사람인가?

그래서 신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불신자도 자기 문제가 있을 때는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의 세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자기 생존을 향한 욕망으로 피터지게 경쟁하고 싸우는 세상에서 이겨야 한다는 궁리만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기기 위해 신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에서 나오는 기도가 곧 이방인의 기도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예수님이 사셨던 삶에 마음을 둡니다. 예수님의 삶이 곧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고 그 길을 갈 수 있기를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세상에서의 경쟁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기만 구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이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에게로 이끌려야 합니다. 내 전부를 버려도 좋을 만큼 크고 귀한 것을 예수님에게서 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자연히 예수님에게로 이끌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고 말씀합니다. 고기를 낚는 어부가 삶이었던 삶을 부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것은, 예수님이 곧 기존의 삶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고기잡이는 오직 나의 생존을 위해서만 한 일이었다면, 이제 사람을 낚는 일은 생명을 위한 일을 하는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직장을 옮기고, 교회 일을 하고, 신학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현장에서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주님이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부르면서 기존의 세상의 것을 구한다는 것은 그 마음에 여전히 세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의 길을 가신다면 그것은 우리 앞에 새로운 삶이 전개되었음을 뜻합니다. 기존의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서 펼치실 새로운 삶에 기대를 두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예수님께는 모든 것을 버려도 될 만한 크고 귀한 뭔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알고, 그로 인해 우리의 온 마음이 예수님에게 향하기를 소원하십시오. 우리에게 이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할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의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은혜와 사랑의 통치와 다스림의 삶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기존에 있던 나라와 주로 말미암은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또 어떻게 다른 나라입니까?

2.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 엇이라고 합니까?

3. 제자들을 부르셔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알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또 그런 제자들의 변화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제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씀에서의 우리의 생각과 또 그에 따른 문제는 무엇입니까?

6.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까닭과 또 그것은 이방 종교와 어떤 다름이 있다고 합니까?

7. 부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삶은 무엇입니까?

8. 불신자가 신을 찾는 것과 신자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9.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2 10월 24일 / 히브리서 51. (히 11:17-19) 믿음으로 드림 관리자 2021.10.24 116
571 10월 17일 / 히브리서 50. (히 11:13-16) 믿음이 하는 일 관리자 2021.10.17 131
570 10월 10일 / 히브리서 49. (히 11:11-12) 믿음으로 사라는 관리자 2021.10.10 123
569 10월 3일 / 히브리서 48. (히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관리자 2021.10.03 135
568 9월 26일 / 히브리서 47.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관리자 2021.09.26 136
567 9월 19일 / 히브리서 46. (히 11:5-6) 믿음으로 에녹은 관리자 2021.09.19 118
566 9월 12일 / 히브리서 45.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관리자 2021.09.12 103
565 9월 5일 / 히브리서44. (히 11: 1-3)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관리자 2021.09.11 212
564 8월 29일 / 히브리서 43. (히 10:36-39) 믿음으로 사는 의인 관리자 2021.09.11 140
563 8월 22일 / 히브리서 42. (히 10:32-35)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 관리자 2021.08.21 96
562 8월 15일 / 히브리서 41. (히 10:26-31) 하나님의 경고 관리자 2021.08.14 106
561 8월 8일 / 히브리서 40. (히 10:19-25) 새로운 살 길 관리자 2021.08.07 90
560 7월 25일 / 히브리서 38. (히 10:10-18) 영원한 은혜 관리자 2021.07.24 101
559 7월 18일 / 히브리서 37. (히 10:5-9) 한 몸을 예비하심 관리자 2021.07.24 84
558 7월 11일 / 히브리서 36. (히 10:1-4) 좋은 일의 그림자 관리자 2021.07.10 92
557 7월 4일 / 히브리서 35. (히 9:23-28) 죄를 없이 하시려고 관리자 2021.07.03 105
556 6월 27일 / 히브리서 34. (히 9:16-22) 언약의 피와 유언 관리자 2021.06.26 108
555 6월 20일 / 히브리서 33. (히 9:11-15) 새 언약의 중보 관리자 2021.06.19 103
554 6월 13일 / 히브리서 32. (히 9:1-10) 신앙의 개혁 관리자 2021.06.13 94
553 6월 6일 / 히브리서 31. (히 8:6-13) 두 언약 이야기 관리자 2021.06.06 113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