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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심

본문 / 1:29-31

 

 

1. 세상의 사고방식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함께 귀신을 다스리시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의해서 귀신이 다스림을 받으며, 신자는 자유를 얻고 은혜의 길을 가게 됨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이 마가의 의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서 나와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공식적인 첫 사건인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회당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회당은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침 받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회당은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에게는 매우 거룩한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그런 유대인들의 회당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귀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악한 영입니다. 그래서 귀신 들렸다는 것을 정신이 이상한 것이나 또는 몸이 병든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악한 영에게 미혹을 받으며 악한 영이 의도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귀신 들린 상태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하지 않으시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은 예수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신과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죄를 보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고,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를 가지고 얼마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귀신 들린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 살도록 부름 받았음에도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 자체가 귀신 들린 상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같은 사실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 드릴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은 결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선악과를 먹으면서 이미 깨어져 버렸습니다. 자신의 욕망의 성취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는 인간의 모습은 말 그대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서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정말로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이루시고 주신 것으로 인해 감사하며 찬양하며 사는 것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피조물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더러운 귀신이 회당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회당에 더러운 귀신이 있는 것입니까? 안식일에 모여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을 가르침 받는 그곳을 더러운 귀신이 장악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이 보시기에 유대인의 회당은 더러운 곳임을 의미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럽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24절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1:24)라는 귀신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존재성에 대해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앎은 신앙이 없이도 얼마든지 알고 인정해 줄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악한 존재여서 무엇으로도 의를 행할 수 없고,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행위를 바라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의 사고방식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를 행함으로써 그 의의 대가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귀신의 사고방식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회당이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실천함으로써 복에 이른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늘의 의가 아니라 인간의 의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회당에서 나와서 곧 이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것은, 회당이라는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가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됨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회당이라는 공동체는 단지 인간의 종교 모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공동체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율법이 전부였고,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하늘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바로 유대인의 회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에도 이런 유대인의 회당은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라고 하면서 실천을 강요하고 또 그 실천의 대가가 복으로 되돌아온다고 말하는 것이 곧 유대인의 회당에서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럽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2. 장모의 열병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예수님으로 인해 새롭게 시작되는 공동체란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먼저 시몬의 장모의 열병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귀신을 나가게 하신 후에 시몬의 집으로 가셨는데 시몬의 집에는 그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중한 열병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심한 고열이 있는 병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열병을 장티푸스나 말라리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열병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이 내용을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4:38-39)고 합니다. 예수님이 열병을 꾸짖으심으로 병이 떠났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열병을 꾸짖었다고 말하는 것은 열병을 단지 질병의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여기고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오늘 본문 앞에 유대인의 회당에서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1:25-26)라고 하는 귀신 들린 자에게 꾸짖어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의 시몬의 장모의 열병 또한 귀신 들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열병은 단지 시몬의 장모만이 걸린 병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걸린 병입니다. 한마디로 귀신 들린 자들이 걸린 병과 같은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현대인의 실상은 마치 열병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중한 열병은 사람을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헛소리를 하게 합니다. 그처럼 세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헛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오로지 자신의 성취를 위해서만 달려갑니다. 자신의 성공과 욕망의 성취를 위해서라면 진리의 말씀도 복음도 외면해 버립니다. 오로지 성공에 도움이 되는 것만 아니 정확히 하면 도움이 될 만한 해석만 하며 말 그대로 헛소리로만 일관될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열병 걸린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열이라는 것은 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증상일 뿐 열이 곧 병은 아닙니다. 즉 열병이라는 병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열병을 고치시기는 했지만 그것이 단지 열을 떠나가게 하신 것이라면 열병이 있게 된 원인은 그대로 있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본다면 오늘 본문에 시몬의 장모의 열병이 떠났다는 것은 열이 있게 된 그 원인까지 모두 해결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몬의 장모는 무엇 때문에 열병으로 자리에 누워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단지 열이 몹시 나는 병으로만 생각한다면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전부일 뿐입니다.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 말고 다른 의미를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기적의 내용은 모두 예수님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또한 그런 모습을 통하여 세상이 예수님을 어떤 병도 고치시는 능력이 있는 분으로 여기기를 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능력을 보고 그 능력에 매료되어 따르는 사람들을 왜 예수님은 물리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능력을 보이시는 목적이 아니라 그 보여준 능력에는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능력만을 보고 따르는 것이라면 오늘날도 예수님은 물리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몬의 장모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앞의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사위인 시몬의 가출사건입니다. 딸 가진 부모의 심정은 모두가 동일할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돈 걱정 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위인 시몬 베드로가 생계와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딸의 엄마로서 어떤 심정이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딸의 장래가 걱정되면서 사위인 베드로가 괘씸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딸의 엄마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베드로가 따라 나선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좋지 않은 평을 듣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생업과 가족을 모두 버리고 따라 나섰다는 것은, 장모에게는 딸의 장래로 인해서 근심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열병으로 자리에 누워있는 베드로 장모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늘 행복을 마음의 소원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행복이 깨어지는 일이 있을 때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우리의 행복과 연관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상은 귀신 들린 우리의 실상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것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게 합니다. 지금 살아가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항상 애굽의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더러운 실상인 것입니다.

 

3. 수종드니라

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심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31절을 보면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장모에게 오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병이 떠납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단지 육신의 병이 아니라 근심과 걱정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라면 손을 잡아 일으켰다는 것은 육신의 병을 고쳤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을 고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걱정과 근심의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열병이 떠난 장모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수종을 듭니다. 이것이 베드로 장모에게 새롭게 시작된 삶입니다. 생업과 가족을 모두 버리면서라도 예수님을 좇을 정도로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삶을 바라봤던 제자들처럼 베드로 장모 역시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삶을 보게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일으켰다는 말은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인생의 전부인 죽은 자의 삶에서 예수님을 수종드는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한 신자에게 시작된 새로운 삶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음으로 가능한 삶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 어떤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기를 거부하는 회당에서는 불가능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써 기쁨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행복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쁨과 행복이 지금 우리에게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당의 더러운 귀신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고, 우리의 입으로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도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신자에게는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보다는 내게 주어질 복을 바라보고 교회는 한낱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행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자로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리에 누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우리를 일으켜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문제는 자신을 자리에 누워 일어날 수 없는 자로 간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걱정과 근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기 행복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이 곧 일어날 수 없는 죽은 자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의 실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잡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손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은 우리를 일으키신 것은 주님의 피와 살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일으켜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 곧 기쁨이며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마치 열병에 걸린 자처럼 정신 차리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육신의 문제에 매임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제자로 보냄 받은 우리의 일을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이 정신 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신자 된 자의 일이 무엇인가 살피고 열병을 고침 받은 여인처럼 수종드는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고 헛소리가 아닌 복음을 말하면서 주의 일을 하는 자로 살게 할 것입니다. 이런 주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드러나는 성경에서의 귀신 들린 상태란 무엇입니까?

2. 귀신 들린 상태와 반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정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3. 예수님을 안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릅니까?

4.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5.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쳤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6. 시몬의 장모의 열병은 무엇 때문이며 또 그것은 왜 걸린 것입니까?

7.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쳤다는 의미는 결국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8. 유대인의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시몬의 장모의 집에 들어가서 하신 일을 통해 예수 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날 주 앞에서의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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