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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신 의미

본문 / 1:32-34

 

 

1. 인간의 한계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건강하게 사는 것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라면 누구든 살아가면서 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는 병은 한마디로 말해서 죽음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가벼운 감기라 할지라도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흔적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굳이 병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죽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흔적은 많이 있습니다. 죽음의 흔적이라는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우리 몸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잘 보이던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던지 또는 생기 가득하던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것들이 결국 모두가 다 죽음의 흔적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흔적을 감춰 보기 위해 여러 가지 의학 기술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조금은 늦출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죽음의 흔적을 목격하게 되면 낙담하게 됩니다. 나도 세월의 무게를 피할 수 없어 많이 늙었구나라고 하면서 늙어가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하면서 젊은 날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흘러간 세월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낙담은 낙담으로 끝날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또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을 항상 보면서도 인간의 존재성에 대하여 생각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죽어가는 것에 대해 아쉬워 할 뿐 인간이 왜 죽어 가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자신의 죽음의 흔적에서 바로 그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또 우리의 죽음을 담당하시고 짊어지기 위해 오신 분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로 그러한 신자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연약함을 아는 자들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은 그 몸에 죽음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말인 즉은 인간은 죽음의 힘에 붙들려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1:34)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앞에서부터 계속해서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이러한 일들을 단지 육신의 병과 정신적인 문제를 고쳐주신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육신의 병과 귀신들림이라는 정신적인 문제를 고쳐주신 것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로 비춰질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사탄이 세상에 내어 놓고 싶은 예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병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에 대해 마태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8:16-17)고 말합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을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의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의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는 사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께 자신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것은 우리가 왜 예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시몬의 장모와 같이 열병이 걸린 것처럼 혼미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에 취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다가와도 복음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다가와도 그 말씀 앞에서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직 자기 생존에 정신 팔려 살고 있을 뿐입니다. 열병에 걸려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교회에 와서 예수를 부르면서도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소리치는 헛소리만 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입니다. 마치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 장모와 같이 예수님께 진정한 간구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그냥 놔두면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만 하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열병을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정신이 혼미한 우리를 제정신이 들게 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기만을 위해 살던 우리를 주를 위해 사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혼미한 상태에서 깨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은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자신의 실상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의 길인가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하며 거짓의 길로만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연약은 필히 죽음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연약함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죽음을 예수님이 담당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심으로써 우리는 죽음에서 해방되었고, 우리의 죽음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으로 이전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인간이 병이 들고 귀신이 들리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병과 귀신을 이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과 귀신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을 바라보면서 인간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연약하기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자신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의와 복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를 붙들어주실 예수님만을 소망하고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정신적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 장악되어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귀신에 장악되어 살아갑니다. 그 증거는 바로 자기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에 붙들려서 예수님조차도 자신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귀신에 장악되어 있는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귀신 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신이 쫓겨 나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자기 사랑이 곧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연약한 자가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고, 자신을 건져낼 분에게 희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으로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들고 귀신 들린 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희망을 둘 수 없습니다. 설사 희망을 둔다고 해도 그것은 기껏해야 자기 문제를 해결해주는 예수 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있는 자로 사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하신 것이고, 우리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을 바라보는 신자에게만 소중할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 죽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멀리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소중하지도 않을 것이고, 십자가의 은혜 또한 은혜로 여겨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신 자신의 일을 도와주고 해결해주는 예수만 생각할 것입니다.

 

3. 귀신의 말과 말씀의 능력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1:34)고 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왜 귀신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귀신이 예수님을 안다는 것인데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귀신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면 그냥 두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누가 되었든 결국 예수님이 증거 되는 것인데 비록 귀신이라도 예수님을 말하고자 한다면 말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알긴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존재성에 대한 것일 뿐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귀신의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아는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죽음에 붙들린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있는 자로 산다는 것이 기쁨이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오히려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로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거절합니다. 예수님과 상관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과 감사에 무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악을 모른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귀신이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면 어떤 말이 되겠습니까?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죄와 죽음을 대신한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귀신이 말하는 예수는 인간의 육신의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예수가 전부일 것입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는 예수를 말하면서 예수만 믿고 충성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예수님이 복 주시고 우리는 그 복을 받아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말 밖에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조금 고상하게 말한다고 해도 결국 신자답게 착하게 살자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귀신은 십자가를 모르니 당연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자신의 죽음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에게 모든 소망을 두면서 예수님을 소중한 분으로 바라보는 신자의 증거가 아니라, 단지 성경에서 배운 것을 머리에 담고 말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말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즉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병든 것이 죽음의 흔적이라면 병이 나은 것은 생명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의 처한 인간의 현실을 바라보는 신자는 예수님에게 모든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자신을 죽음에서 건져내어 생명에 있게 한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에 순종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주님의 길은 고생도 고통도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길이라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은혜를 맛보아 아는 신자라면 그러한 기쁨에 마음을 두고 예수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일으키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베풀어질 은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음의 흔적을 가진 채 죽음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에게야 말로 희망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라면 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저주에서 건져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감사가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죽음의 흔적을 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흔적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가장 급박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다만 육신을 힘들게 하는 일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마태는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8:16)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세계입니다. 말씀의 세계 안에서 세상 문제, 즉 우리의 생존과 연관된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소한 것으로 여겼던 생명의 문제가 우리 인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로 우리 마음에 퍼지게 됩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신자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 때문에 사도가 옥에서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과 저주와 비참함을 예수님이 모두 담당하시고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의 자리로 돌려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지금도 성령을 보내셔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예수님의 이 일을 믿는 것이야 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병들고 귀신 들린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죽음의 흔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에 붙들려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와 사망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믿음의 시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주의 은혜가 충만한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죽음을 대하는 신자와 불신자의 모습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2. 고침과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단지 육신의 병 고침으로 보면 안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마태는 예수님의 병 고침과 귀신 축사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4. 하나님의 시각에서의 우리의 실상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5. 오늘 말씀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무엇이라고 정의 합니까?

6.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병 고침과 귀신 축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우리가 생각하는 아는 것과 성경이 말씀하는 아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8. 문에서 예수님이 귀신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우리가 알아야할 말씀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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