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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죄를 사하는 권세

본문 / 2: 6-12

 

1. 믿음이란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내려놓는 사건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입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과 열심을 근거 삼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오게 되는 수직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들은 문둥병자가 고침 받았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의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서기관이 등장한 것입니다. 반면에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자비하심과 능력만을 구하는 수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죄 사함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많은 의문이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중풍병자나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한 것은 죄 사함이 아니라 병 고침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예수님이 결국에는 중풍병자를 걷게 하셨지만 어쨌든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죄 사함이라는 다른 문제를 가지고 중풍병자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올 때 우리가 어떤 소원과 열망을 가지고 나왔든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고 우리를 만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문제는 주의 뜻 안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유익한 길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믿는 것은 예수님의 일하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어떤 일을 또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행하신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앎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의 육신의 모든 문제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되어지는 모든 일을 주가 이루신 것으로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2. 성경의 의도와 우리의 시각

오늘 본문에 보면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으로 인해서 시비가 발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5)고 하는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이 모두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7)라는 생각을 품게 되고 그러한 생각을 아신 예수님이 “8.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2:8-10)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죄 사함에 대한 그 당시 서기관들의 생각은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죄 사함의 근거는 자기 자신들에게 두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은 아무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 받을 만한 사람은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말 한마디로 죄가 사해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서기관들 입장에서는 자리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 한마디로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용납된다는 것은 자신들이 평생토록 쌓아온 의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율법을 지키며 살았는데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 한마디로 죄가 용서되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 당시의 서기관들처럼 우리의 행위 여부에 따라 복을 받고 또는 받지 못하고가 결정 된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행위 여부를 보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분리하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우리의 생각들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기 때문에 오늘 본문도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을 뚫어서 병자를 예수님에게 내리는 사건은 포기할 줄 모르는 인간의 열심이나, 하면 된다고 하는 거짓된 해석과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과 신자의 수직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오늘 본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의 하면 된다고 하는 구호의 타당성을 보여주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2:9)는 말씀을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하신 것이겠습니까? 우리들은 대개 예수님의 이 질문을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용서와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치유의 말 중에 어느 것이 쉬우냐?’라는 의미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지금 당장 결과가 나타나야 하는 말이지만,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당장 없기 때문에 죄 사함 받았다는 말이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기 때문에 쉬운 것이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당장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도리어 어려운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일어나 걸아가라는 말을 먼저 하셔서 중풍병자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죄 사함 받았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인데, 굳이 쉽게 여겨지는 죄 사함 받았다는 말을 먼저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해석이 꼭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나 통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사상이 있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도 여호와라는 말이 나오면 밖에 나가 손을 씻고 와서 기록하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과연 죄 사함 받았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의 이 말씀은 죄용서와 병 고침의 말 중에 어느 것이 쉬운가?’ 라는 물음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일어나 걸어 다니게 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육신의 병을 해결해주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단지 움직일 수 없는 육신의 열악한 조건을 가진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는 중풍병일 수 있고 누구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을 중풍병자와 같은 상태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 앞에 등장하는 문둥병자 역시 문둥병이라는 병에 걸린 한 인간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 문둥병자를 등장시켜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문둥병이라는 저주 아래 있는 상태이며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사람이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회당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사람 역시 당시 유대인들의 상태가 귀신 들려 있는 것이었으며, 지금 모든 인간이 귀신들린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성경의 말씀들이 어니 시대, 어느 환경에서나 나 자신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우리 자신에게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이어지는 중풍병자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중풍병자가 의미하는 것도 당시 율법에 매어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에 매어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에서 끊어질 것을 염려했고 그래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관계를 붙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의의 행위의 자랑만 있었을 뿐입니다. 은혜와 자비하심이라는 하나님의 풍성함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에 매여서 자신의 행위를 보며 울고 웃는 율법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상태를 중풍병자를 세워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자의 증상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죄 용서는 바로 이런 인간에게 자유가 되며, 율법에서 해방되어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 가운데 포함된 뜻입니다. 결국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나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외에는 무엇으로도 죄를 사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준 높은 선을 보이고 행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선과 행위로도 덮을 수 없는 것이 죄의 악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죄의 악함을 윤리와 도덕의 수준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윤리와 도덕이 선하면 죄가 덮어질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예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음을 믿는 신자라면 인간의 선한 행위, 즉 인간의 공로를 높이거나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의의 행위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공로만을 의지할 뿐입니다. 이처럼 죄 사함의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믿는 신자는 인간의 공로를 보지 않기 때문에 타인과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를 보시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용서하신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자신의 선한 행위를 바라보지 않게 합니다. 비록 타인이 칭찬할 만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자신은 악한 자일뿐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빛 되신 말씀을 통해 우리의 어두움을 충분히 본 자들이기에 오직 선한 행위는 주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고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이 죄 사함이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나를 보지 않고 또 이웃을 보지 않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바라봄이 요동하지 않음을 기억하셔서 오늘도 놀라운 권능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주 만을 의지하게 하는 복된 길로 세워 가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과 신자는 어떤 관계이며 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 우리가 하나님께 갖는 기대와 신자 된 우리의 본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합니까?

3. 예수님의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시비가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우리에게 있는 당시 서기관과 같은 생각이 만들어 내는 성경해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오늘 본문에 대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해석에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합니까?

6. 성경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등장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오늘 본문에서도 중풍병자를 등장시켜 말씀하시려는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죄 사함에 대한 우리의 착각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릅니까?

9.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신자들의 증상은 무엇으로 나타난다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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