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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본문 / 2:13-17

 

 

1.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세리인 레위, 즉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보는 당시 세리를 향한 유대인들의 반응에 비춰 보면 참으로 파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리는 로마를 위해 일하면서 세금을 부당하게 거둠으로써 히브리인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가 비록 유대인이었다고 해도 미움의 대상이었고 죄인으로 취급되는 낮고 천한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한 사람을 제자로 부르면서 그 집에서 세리와 함께 죄인으로 취급받는 다른 사람들과 음식을 같이 드시기도 합니다. 늘 본문에 보면 이러한 행보를 본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2:16 )라고 질책을 합니다. 그와 같은 질책을 들으신 예수님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우리와 관계하시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 땅에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라면, 그것은 의인의 의의 행동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인이 의롭게 살았으니 하늘로부터 부름을 입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부름을 이런 의미로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그 당시의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같은 부류들이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자신의 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차원의 응답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셨고 또 의인이 부름을 받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그 하늘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마도 누구의 의가 더 큰가를 내세우면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천국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의인이 있지만 그들을 부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아예 의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의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 성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소돔에 의인은 없었고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의인이 없었던 소돔의 형편과 지금의 형편이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의인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감히 자신을 의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누구나 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심으로써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하신 그 방법으로 세상과 관계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2. 말씀이 하는 일

그러나 이러한 말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천대받는 계층의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이 사회적으로 천대 받는 계층의 사람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회운동가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을 편들고 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 또는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라는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한 구별은 하나님 나라에는 없는 것입니다. 있다면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구별일 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3장에 보면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3:1-4)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길을 예비하러 보낸 세례 요한의 외침입니다. 이 세례 요한에게는 예언된 사역이 있습니다. 말라기서 4장에 보면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4:5-6)고 합니다. 여기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말씀은 엘리야와 같은 직무를 수행할 선지자를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그 직무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바로 이스라엘의 마음을 주께로 돌이키기 위해 온 마지막 선지자며 엘리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말하는 회개는 단지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차원의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천국은 단지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뜻함으로써 기존의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계가 주님과 함께 왔으니 모든 마음을 주님에게 돌이키라는 의미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외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은 이사야서 40장에 등장하는데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40:3-8)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있게 하실 것인데, 그가 할 일은 세상에 치우쳐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며 마르고 시들 수밖에 없는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 선지자로 온 세례 요한은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으니 그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신 주께로 마음을 돌이킬 것을 촉구하는 일을 위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로 세우신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라엘에게 선지자의 등장은 신앙적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모든 관심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번영에 두고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는 멀어짐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 이스라엘을 경고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기 위해 일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선지자를 세워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에 세례 요한을 세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 보면 평탄케 한다는 말의 의미를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고,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낮은 곳은 돋우어지고 높은 곳은 낮아짐으로써 평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평평하게 함으로써 어려움이 없는 편안한 길이 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높은 곳이 있고 낮은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해서 높은 자가 있고 낮은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낮은 자리를 벗어나 높은 자리에 위치하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절망하고 세상을 향해 분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도 세상의 기준에 서서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열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주님의 세계는 그러한 높고 낮음이 없는 세계임을 외칩니다. 세상에서는 높고 낮음이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는 평평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있다면 모두가 죄인일 뿐이고 죄인 된 나를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 안에서 높고 낮음이 있는 세상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은 낮아지고 낮은 곳은 돋우어진 평탄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의 것으로 높고 낮음을 경쟁하고 싸우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높고 낮음의 문제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해야 할 죄입니다. 타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말로 평탄케 하신 주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악한 마음인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러나 우리는 이런 악에서 벗어나 살지를 못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아담의 죄의 본능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죄에 붙들린 자로서 사망에 처할 존재일 뿐임을 알게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게도 하고 또는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죄의 값이 무엇인가를 알지도 못한 채 오직 자기 자신의 의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게도 합니다. 이들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을 죄를 깨달은 죄인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고집으로 자기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되고, 우리 속에 감추어져 있는 욕망이 드러남으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해도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예수님께 나오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스스로 자기 죄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자기 의가 되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형편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위치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을 때는 단지 자신을 위해 일해 주는 신으로만 간주하고 찾을 뿐입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실체가 어떠함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죄인이라는 고백과 함께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역사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실 백성을 찾아 구별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목적

그러면 예수님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죄인을 불러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세상에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호세아 6장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한다고 하시지만 인애는 인간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역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사나 번제는 인간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장엄하고 화려한 제사와 번제는 얼마든지 만들어서 할 수 있지만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 일의 성취를 하나님이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고 죄인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인애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을 세상에 보내서 인애와 자비하심에 참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애와 자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김 받는 대상으로 만드시는 것이고,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실체를 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만이 하나님의 인애와 자비를 알 수 있고, 예수님의 부르심 안에서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만을 높이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관계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있는 신자에게서 자기 행함을 의로 간주하면서 타인의 행함과 비교하고 자신의 행함을 자랑하고 의로 높이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인 우리가 항상 확인할 것은 긍휼이 적용되는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신자에게서는 예수님의 긍휼이 동일하게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긍휼은 의인들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의인들은 긍휼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의로 얼마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 밖에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기 위해 세상에 오신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에 도취되어서 하늘의 복도 자기의 의를 내세워서 확보하려고 할 뿐입니다. 그래서 다만 의의 행위를 하려고만 애쓸 뿐이고 믿음 역시 의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밖에 있기 때문에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서 무엇을 보고자 하십니까?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의 운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밖에서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인간의 실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서 그러한 인간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나올 때 비로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바로 이 긍휼과 자비를 생성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문둥병자나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죄인 된 자에게 주어지는 긍휼의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받은 것은 이 긍휼의 은총입니다. 죄인 된 자를 부르셔서 베푸신 것이 바로 이 긍휼이며 자비하심입니다. 더러운 자가 깨끗함을 입었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증거 할 것은 오직 주의 긍휼과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오직 주의 긍휼과 은혜만을 자랑하고 선포하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죄인이 아닌 의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 합니까?

2. 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성경의 말씀은 어떻게 다릅니까?

3. 세례 요한의 직무와 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친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보는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보내 하시고자 한 일은 무엇입니까?

5.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어떤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하셨다고 합니까?

7. 씀을 통해 알게 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하신다고 합니까?

8. 하나님께서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신자의 신자다움은 무엇이며,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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