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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본문 / 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2:18-22)

 

 

1. 질문

예수님을 찾아온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되고, 중풍병자가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과 함께 일어나 걸어가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 유대 사회가 갖고 있었던 잘못된 종교적인 모습들을 지적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거룩함은 인간들의 어떤 종교 행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또 그 종교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존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사고방식이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에 단절을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거룩은 인간의 그 어떠한 종교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와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세리의 집에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책망하는 것도 자신들의 종교 행위를 기준으로 하여 인간을 구분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며 철저한 종교 생활을 유지하는 그들에게 세리와 같은 사람들은 상종할 수도 없는 부정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비해 열심이 종교 생활을 하는 자신들은 신앙적으로 아주 건강하고 거룩한 존재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가진 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2:1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국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무엇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종교 행위가 실상은 예수님과의 관계 단절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인간의 종교 행위 자체를 거부해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종교 행위가 인간을 거룩하게 한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떤 종교 행위를 얼마나 하든 상관없이 인간은 병든 자이고 그래서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니면 고침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런 종교 행위를 중요시 하는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또 다시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2:18)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의 날을 정하고 그 규례를 따라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래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저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가?’라고 말하면서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적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본문 19절부터 보면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19-20)고 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2:21-22)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금식이라는 것은 중요한 신앙의 행위와 덕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금식의 의미보다는 금식하는 것 자체를 신앙으로 여기는 오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나 오늘날이나 우리들의 신앙은 안식일의 의미, 십일조의 의미, 제사의 의미 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처럼 단지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제사를 드리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라는 구별만 만들어 내는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 또한 행위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시각으로만 신앙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에 의해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신앙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답변-금식에 대하여

그런데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은 대답은 놀랍게도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예를 혼인집을 들어서 말씀하시는데,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인을 행하는 날은 모두에게 기쁨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면에 금식이란 애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음식을 끊을 정도로 애통하다는 마음을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은 그 하나하나가 신랑이 함께 있을 때 일어나는 생명의 능력에 대해 증거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나, 열병과 각종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일 그리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 하나하나가 신랑이 함께 함으로써 나타나는 생명의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기쁨의 날이기 때문에 금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 날에는 금식하라고 하십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것은 세상이 신랑을 제거하는 날입니다. 이 날에는 애통해야 하고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신랑이 죽었다는 것을 슬퍼하고 금식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랑을 죽이는 일에 나 자신도 역시 동참했음을 깨닫고 심히 애통해 하며 금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너희들 왜 나의 신랑을 죽였느냐?’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내가 죄인이고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금식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즉 실제로 음식을 끊는다는 것이 금식이 아니라, 자신의 실체를 앎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격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그 마음으로 음식을 끊는 것이 참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라면 자신의 종교 행위, 즉 금식을 하고, 제사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것으로 자신이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가 바로 난데 그러한 죄가 내가 제사를 드린다고, 금식 했다고 해결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행위로도 그 죄는 덮을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 함께 하는 것입니다.

 

3.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예수님은 이 땅에 생베 조각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생베 조각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에 전에 있었던 것은 모두 옛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옛것과 새것은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2:21)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쓰은 그 당시의 천의 상태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지금처럼 천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고, 화학섬유가 없이 모두가 자연섬유였습니다. 때문에 빨면 천이 줄어들었고 몇 번을 빨아야 비로소 줄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서 빨게 되면 생베조각이 줄면서 주위의 낡은 천을 당기게 되고, 결국 낡은 옷은 당기는 힘에 의해서 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새 포도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22)고 하십니다. 이 말씀도 그 당시의 낡은 가죽 부대의 상태를 이해하면 됩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너무 낡아서 곧 터질 것 같은 부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곧 터질 것 같은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목축을 하였기 때문에 양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 꿰매서 포도주를 넣는 부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죽으로 된 부대가 오래되면 가죽의 특성인 신축성이 사라지고 뻣뻣하게 됩니다. 그러한 부대에 발효가 끝나지 않은 새 포도주를 넣게 되면 결국 낡은 가죽 부대는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발생한 가스로 인한 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먼저 낡은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인들이 대대로 지켜오던 구약적 규례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할례를 행하고 제사를 행하고 절기를 지키는 제도와 격식을 통해서 자신들이 보전된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들을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예수님은 옛 시대, 즉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제는 제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이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유대인의 규례 아래서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보여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금식하는 자신을 하나님의 규례를 잘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시각으로는 자신을 저주를 받아야 할 죄인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죄인에게 함께 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새 시대의 기쁨은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는 기쁨은 저주에 갇힌 자신의 실상을 알았을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제도나 격식, 형식을 잘 지키고 따르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저주에 갇힌 자라는 것을 잊는 것이 곧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는 것이 되고, 제도나 격식,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자신을 보지 않고 저주에 갇힌 자기 실상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심이 생명임을 안다면 그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도나 형식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새 것, 즉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은 옛것의 상태 그대로인 사람에게는 오히려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적인 욕심과 소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그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인간의 종교 행위에 기대고, 그러한 종교 행위로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는 것은, 옛 성품과 옛 가치관과 개념이 그대로인 사람으로는 예수님의 복음에 함께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저들이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책망 또한 옛 성품의 흔적일 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또한 이러한 옛 성품의 흔적들을 수시로 드러내며 살아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막상 복음을 듣는 자리를 떠났을 때는 복음에 의해 다스림 받는 성품이 아니라 옛 성품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들은 복음을 훼손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받는 우리가 옛 성품 그대로인지 아니면 복음에 의해서 깨어지고 고침 받은 새로운 심령으로 복음을 간직하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을 듣고 알았다면 그 복음에 의해 내 자신이 깨어지고 고침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신자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종교 행위도 나를 사람답게 만들지 못합니다.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인간은 악한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로도 그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고 타인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두가 고침을 받아야 할 더러운 자고, 용서를 받아야 할 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복음에 의해 깨어지고 고침 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과연 새 부대로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를 정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아는 우리들에게서 과연 옛 성품의 흔적이 나오는지 아니면 복음에 의해 고침 받은 새로운 성품의 흔적이 증거 되는가를 살펴보시고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의 말씀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함을 기억하셔서 들은 말씀으로 우리가 무너지고 거룩한 주의 마음을 품은 자로 세워져 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신앙적 사고방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수는 말씀의 의미 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잘못된 신앙의 오류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의미는 무엇이니까?

5. 예수님이 말씀하신 금식의 때는 언제이고 또 진정한 금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예수님이 말씀하신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7.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9.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이 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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