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9,396
오늘 : 225
어제 : 284

페이지뷰

전체 : 78,730,539
오늘 : 1,477
어제 : 1,18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본문 / 2:23-28

 

 

 

1. 바리새인의 안식일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정당성을 자신이 정당한 행동을 하는 것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정당한 행동을 하는 나는 정당하고, 정당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당신은 정당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문제는 과연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 행동이 정말 정당한 행동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을 정당한 존재로 만들어 줄 수 없는 행동을 기준으로 하여 본인 스스로가 정당하다 또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보면 사람들은 이런 잘못을 수시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행동들이 실상은 정당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타인을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평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등장을 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23-24)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바리새인들로서 이들은 자신들의 규정, 즉 안식일에는 곡식을 추수할 수 없다는 규정을 내세워서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대하여 예수님은 “25.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5-28)고 말씀하심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할 수 없는 규정을 정해 놓고, 그것을 그대로 지키면 하나님 앞에 정당하고, 지키지 않으면 정당하지 못한 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잘 지키고 있는 자신들을 정당한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바리새인들은 결코 정당한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조차 몰랐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그냥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선까지를 안식일에 하지 말라야할 일로 간주해야 하느냐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주일에 TV를 보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청소도 하지 말라야 했고, 빨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 모두가 일을 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안식일에 할 수 없는 규례를 정해 놓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곧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한 날이었고 그리고 그 날에 무엇을 하느냐 또는 안하느냐에 의해 안식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로 판가름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규례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명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유대인의 규례가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늘날 주일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안식

우리가 먼저 보아야할 것은 안식일이 어떤 날인가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2-3)고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완성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만큼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모자람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안식이었고,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에 인간이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즉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즐거움에 초대받은 자가 바로 죄 없는 상태의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죄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죄 있는 자가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은 더 이상 안식에 거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인간이 에덴, 즉 하나님의 안식에서도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쫓겨난 상태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을 잃어버린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받은 인간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자들이 아닌 어린양의 피로 구별하여 출애굽하고 구원된 이스라엘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어린양의 피로 인해 구원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로써 구원된 자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한 예를 들어, 즉 다윗이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은 일을 두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내용은 사무엘상 21장에 있습니다. “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삼상21:1-6)고 합니다. 이 내용은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부하 몇 명만 데리고 피신 중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다윗이 피신 중에 배가 고파서 성막 안으로 들어가 제사장에게 부탁해서 진설병을 얻어먹게 됩니다. 진설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으로써 성막 안 상 위에 매 안식일마다 제사장이 새로운 것으로 진열합니다. 그때 묵은 떡은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인데 다윗 일행은 안식일에 제사장이 아닌 신분으로 그 떡을 먹은 것입니다. 떡을 먹은 다윗이나 떡을 먹도록 한 제사장의 행위를 두고 본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규례를 어긴 것이 되지만 제사장이나 다윗은 그 일로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서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법에도 눈물이 있고 인정이 있다는 식으로 배고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묵인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이런 것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자기 입장을 내세우면서 심판의 부당함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예를 드신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 규례를 주신 목적과 의미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라는 날을 지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거룩한 날을 지키는 방법이 가장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는 다윗의 이러한 행위가 분명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의 행위를 율법을 어긴 것으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참된 의미는 그 정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 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참된 자녀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도 굶주릴 때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었지만 이것이 안식일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었던 것은, 자비의 정신을 내포한 것이 안식일의 참된 정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단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노동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노동을 쉬고 하나님께 제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잊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비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안식의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3. 안식을 누림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도 안식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는 주일에 예배를 드림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뜻과 마음보다는 말씀을 지키는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두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자신은 자연히 말씀을 지키는 거룩한 신자로 평가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복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코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자가 과연 어디에서 무엇으로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세상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없는 편안한 형편에 있고, 세상 것이 부요하다고 해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안식은 그처럼 세상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으로 편안함을 누리고 산다고 해도 인간이 떨쳐 버릴 수 없는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인간이 범죄 함으로 인해 사망이라는 운명에 처하게 됨으로써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도 어떤 형편에서도 참된 안식은 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두려움인 사망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킴으로써 안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안식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이스라엘의 제사를 통해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허물이 사함을 입게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되는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이 화목이 예수님으로 인해 이루어졌기에 오늘날 참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특정한 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시간을 정해 놓고 구분을 하고 있고 날 역시 구분을 하지만, 사실 날이라는 것은 해가 뜨고 짐으로써 반복되는 낮과 밤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러한 날을 구분해서 어떤 특정한 날이 더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규정을 세우심으로써 이스라엘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가르쳐주고자 하셨습니다. 노동을 쉬라고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사는 것은 자신의 힘의 덕분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 살아가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믿고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전부입니다.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야 말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제사를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의 생명의 근거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야 말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가를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내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든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독생자를 버리시고 사망에서 나를 건져 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정하시고 인도하시는 길을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에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일입니다. 그렇게 보면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일을 하지 않고 교회를 나온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안식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주일에 교회로 모여야 하는 이유는 신자란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것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기뻐하는 감사하는 세계가 있음을 증거하고, 그 세계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음을 감사하기 위해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없는 안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미도 그리스도로 이루신 모든 평안과 안식을 온전히 누림으로 하늘에 소망을 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들이 가진 정당성에 대한 기준과 판단이 잘못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늘 본문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내용과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안식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합니까?

4. 예수님이 오늘 말씀에 안식일의 주일이라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는 사건으로 알 수 있는 안식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6. 주일을 지킨다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안식일을 지키는 개념은 어떻게 다릅니까?

8.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안식을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2 10월 24일 / 히브리서 51. (히 11:17-19) 믿음으로 드림 관리자 2021.10.24 116
571 10월 17일 / 히브리서 50. (히 11:13-16) 믿음이 하는 일 관리자 2021.10.17 131
570 10월 10일 / 히브리서 49. (히 11:11-12) 믿음으로 사라는 관리자 2021.10.10 123
569 10월 3일 / 히브리서 48. (히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관리자 2021.10.03 135
568 9월 26일 / 히브리서 47.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관리자 2021.09.26 136
567 9월 19일 / 히브리서 46. (히 11:5-6) 믿음으로 에녹은 관리자 2021.09.19 118
566 9월 12일 / 히브리서 45.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관리자 2021.09.12 103
565 9월 5일 / 히브리서44. (히 11: 1-3)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관리자 2021.09.11 212
564 8월 29일 / 히브리서 43. (히 10:36-39) 믿음으로 사는 의인 관리자 2021.09.11 140
563 8월 22일 / 히브리서 42. (히 10:32-35)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 관리자 2021.08.21 96
562 8월 15일 / 히브리서 41. (히 10:26-31) 하나님의 경고 관리자 2021.08.14 106
561 8월 8일 / 히브리서 40. (히 10:19-25) 새로운 살 길 관리자 2021.08.07 90
560 7월 25일 / 히브리서 38. (히 10:10-18) 영원한 은혜 관리자 2021.07.24 101
559 7월 18일 / 히브리서 37. (히 10:5-9) 한 몸을 예비하심 관리자 2021.07.24 84
558 7월 11일 / 히브리서 36. (히 10:1-4) 좋은 일의 그림자 관리자 2021.07.10 92
557 7월 4일 / 히브리서 35. (히 9:23-28) 죄를 없이 하시려고 관리자 2021.07.03 105
556 6월 27일 / 히브리서 34. (히 9:16-22) 언약의 피와 유언 관리자 2021.06.26 108
555 6월 20일 / 히브리서 33. (히 9:11-15) 새 언약의 중보 관리자 2021.06.19 103
554 6월 13일 / 히브리서 32. (히 9:1-10) 신앙의 개혁 관리자 2021.06.13 94
553 6월 6일 / 히브리서 31. (히 8:6-13) 두 언약 이야기 관리자 2021.06.06 113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