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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본문 / 3: 1- 6

 

 

1. 하나님과 우리의 시각 차

사람이 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범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연관된 자로 산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지키고 또 법을 지킬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신앙이 없고 하나님과도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한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어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처럼 법을 어기신 것입니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이삭을 잘라 먹은 것도 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들 모두가 예수님이 안식이라는 법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안식일 법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안식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앞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이나, 예수님이 안식일 주인이라는 말씀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기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들의 법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시지 결코 법을 실천하는 우리들의 노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법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바른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결국 생명과 상관없는 길에서 엉뚱한 것을 붙들고 애를 쓰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중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주관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만 이해하기 보다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고 무엇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가?’에 중점을 둔다면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오류에는 쉽게 빠져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신자의 신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의 신앙은 인간의 열심을 중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열심 있는 인간의 실천과 행위야 말로 신앙의 열매이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은 인간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의 의미를 깨닫고 그 일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신앙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완악한 인간

오늘 본문에도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시비가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3:1)고 합니다. 손이 말랐다는 것은 한쪽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그 회당에 예수님이 들어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이 또 다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지 주시하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면 안식일을 어긴 것을 빌미삼아서 예수님을 제거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표면적으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느냐 아니냐를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대립이 발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배경에는 신앙의 중요한 본질,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금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율법인 미쉬나에 따르면 안식일이라고 해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허용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방치하여 죽게 하는 몰상식한 인간을 만드는 율법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바리새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손 마른 병입니다. 손 마른 병은 손이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는 장애는 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병은 아닙니다. 때문에 안식일에 고치지 않고 다음 날 고쳐줘도 될 병이었습니다. 아마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병자였다면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는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는 것은 그들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예수님이 아시고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더니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물음에 대해 유대인들은 대답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했던 안식일은 무엇을 행하는 날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가 주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과 같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을 예배를 드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고치지 않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으면 그들은 선뜻 고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답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안식일 규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고치지 않는 문제로 그들에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의 문제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게 되면 결국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들의 법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들 방식을 고수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두고 완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명 인간이 고안한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한 방식에 의해서 지켜지고 유지될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앞에서 인간은 인간이 고안한 모든 방식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인간이 어떤 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가 지켜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믿음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완악하다는 판단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3. 악을 행하는 것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에는 한 가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손 마른 사람은 그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즉 그를 고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죽이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가르쳐주고자 하신다면 손 마른 사람보다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등장시켜서 생명의 문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생명은 단순히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손 마른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인 실상이 어떠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등장했던 많은 이들이 유대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의 손 마른 사람 역시 자기들의 법에 매어 살아가는 그들의 실상이 손 마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손은 사람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인데, 그 손이 말라 쓸 수가 없다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자기들의 법에 매인 유대인들의 실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일어서게 하셔서 모든 사람들로 보게 하신 것은 손 마른 사람이 곧 그들의 실상,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치료하시는 선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한 선을 행하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악을 행하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즉 안식일에 하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란,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에서 쫓겨남으로써 사망에 처하게 된 인간을 건지시고 생명에 있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사랑과 긍휼의 일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이 얼마나 크고 높으신 은혜인가를 증거하고 보이는 것이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같은 상황에서의 다른 내용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9절부터 보면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9-12)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에 양 보다 귀한 사람을 구하는 것을 예수님이 행하신 선으로 말하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안식일에 선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선을 행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식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해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규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의 세상이 따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안식일 규례에서 안식의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고 안식일 규례를 지키는 것이 곧 자신들에게 복이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의 세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몸담고 사는 세상에서 누리는 복에 마음을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주어진다고 여겼기에 자연히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내는 것을 허용하는 것에서 보는 것입니다. 양은 목축을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큰 재산이기에 안식일에 생명은 구할 수 있다는 규정으로 자신들의 재산에 손해가 발생할 수 있는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는 말로 예수님에게 시비를 겁니다. 만약에 안식일이라고 해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내는 것을 옳다고 여기는 그들의 마음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면 오늘 본문의 손 마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덩이에 빠진 양이 죽는 것을 재산의 손해로만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안식일 규례를 아무리 세부적으로 만들고 준수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4. 선을 행하는 것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하셨기에 구덩이에 빠져 나올 수 없는 양을 구해 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선을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선한 일, 그것이 인간에게는 능력이 되어 생명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선을 행하자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어 우리를 구덩이에서 끌어내었고 생명이 되었음을 감사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안식일 규례에 담긴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의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가는 세계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자비와 긍휼의 일이 우리에게 선이 되어 우리를 구출하고 생명에 있게 한 것에 감사하는 그것이 신자에게는 쉼이 되고 안식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규정만 잘 지키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그런 신앙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교회 또한 신자를 어떤 규정으로 묶어 두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행해야 할 것을 말하기보다는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이 우리에게 어떤 능력으로 다가왔는가를 말해주고 알게 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들이 만든 안식일 규례에 매인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실천하는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증거 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곧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고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심으로써 인간의 질고와 연약함을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하나님과 단절됨으로써 사망에 있던 죄인 된 자를 하나님과 화목 된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해 오셨음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가 진정한 안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국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법을 지켜서 하나님과 거룩된 관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분명 믿음도 신앙도 아니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아무리 자신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법을 지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법을 잘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자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법을 잘 실천하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셨다면 동물을 훈련시키는 것처럼 시키는 대로 잘 할 때마다 먹을 것을 주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를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교회를 빠진 사람보다 더 좋고 많은 것을 주신다면 누구나 주일을 지키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믿음에 의해 새롭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즉 인간의 방식이나 인간의 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 하려고 할 뿐입니다. 신자는 항상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봐야만 합니다. 그럴 때 생명의 능력은 주께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주를 믿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즉 신자는 어디에서든 어떤 알이든 상관없이 믿음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법을 아무리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능력은 주님께 있기 때문에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생명을 살리는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행위가 아닌 생명을 살리는 주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예원가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의 의도와 그런 자들의 신앙의 착각은 무엇입니까?

2.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왜 중요한 것입니까?

3.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것을 주시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또 그것을 깨기 위해 주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5. 오늘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등장시킨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안식일 규례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잘못 인해한 인간들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7.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는 것과 손 마른 자를 보는 그들의 시각은 무엇입니까?

8.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과 우리가 생각하는 선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9. 법을 지키는 자와 예수님의 선을 누리는 자는 어떻게 다르게 드러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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